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4월 19일] 4·19혁명 50주년의 의미

4ㆍ19혁명은 우리 현대사에서 역사의 분수령이었으며 민주운동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필자는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겪은 세대이다. 필자가 경험한 현장의 분위기를 두 가지 들어보면 이러하다. 하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중심을 이뤄 시위대를 이끌었는데 이들은 건물 등 공공기관에 돌을 던져 유리창이나 이승만의 초상화 따위를 파손하면서도 결코 파괴를 일삼지 않았다. 또 한두 건을 제외하고는 방화를 하지 않았다. 다음은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이 많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결코 상점이나 은행에 들어가 약탈을 하거나 파괴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학생들 틈에 끼어 독재타도나 '부정선거 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민주가치위해 전국민 동참 오늘날 세계곳곳에 일어나는 시위나 재앙의 현장에서는 약탈ㆍ방화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과 비교해 4ㆍ19혁명의 이성적 행동을 새삼 눈여겨볼 대목일 것이다. 그러면 4.19 데모는 왜 일어났는가. 이승만 독재정권은 집권한 뒤 무엇보다 친일파를 끌어안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대파를 툭하면 '빨갱이'로 몰아 탄압을 가했다. 정권에 빌붙은 사람들은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오죽하면 경찰이나 공무원들을 공적이라 여길 지경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는데도 헌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해괴한 수학 이론을 끄집어내 통과를 선언하게 했다. 집권당인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허수아비였다. 게다가 지난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방법의 부정행위를 자행했다. 고무신ㆍ막걸리를 골골에 돌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투표장에서 굴비를 엮듯 서로 감시하면서 투표하게 했고 개표를 해보니 한 투표구에서 유권자보다 많은 표가 쏟아지기도 했다. 물론 자유당 후보인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했다. 3ㆍ15 부정 선거의 중심에는 경찰과 공무원들이 있었다. 이런 부정선거의 과정에서 처음에는 마산 시민들이 항의 데모를 벌였고 이어 이곳 저곳에서 대학생ㆍ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해 4월18일 고대생 대모대가 학교로 귀환할 때 몽둥이ㆍ자전거줄ㆍ쇠파이프를 든 괴한들이 습격을 한 사건을 계기로 4월19일 전면적인 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에는 시민만이 아니라 초등학생과 대학교수까지 합류했다. 독재자의 하수인인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했지만 마침내 이승만은 하야했고 이기붕은 일가족이 자살했다. 이승만 독재와 자유당 정권은 몰락했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다. 4ㆍ19 주역들은 학생신분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었으나 남북 평화통일운동 등에 나서서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5ㆍ16 군사쿠데타로 좌절하고 말았다. 그 뒤 역대 군사정권 아래에서 민주질서는 마비됐고 대통령 간선제로 최소한의 민주주의 절차마저 지켜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성립된 뒤 40여년 동안 민주주의는 유린돼왔다. 하지만 시민과 학생들은 4ㆍ19혁명의 전통을 이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질서와 민주가치를 위해 중단 없는 투쟁을 거듭해왔다. 민주 유산 지키기 의지 다져야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약간의 전진과 후퇴가 거듭되고 있으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고 있다. 현재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ㆍ남아메리카ㆍ중앙아시아 국가의 시민들이 독재에 항거해 무수한 희생을 내고 있고 그 국가의 독재자들은 수많은 살상이 저지르면서 완고하게 버티고 있다. 우리는 4ㆍ19정신을 바르게 이어받아 민주주의 절차가 훼손되는 비극을 다시는 연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0주년을 맞이해 우리의 소중한 기억과 역사 경험을 살려 민주주의 유산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를 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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