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바둑영웅전 제4보

바둑영웅전 제4보10대 입단의 시대 1급이 된 후부터 김인은 한국기원의 수문장 같은 입장이 되었다. 그것이 1957년. 이 무렵까지만 해도 경향 각지에 독불장군들이 저마다 자기 실력을 과신하고 지냈다. 아직 한국기원의 통제력이 확립되기 이전이었고 조남철의 송원기원이 급수 인정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개의 애기가들은 자신의 급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터였는데 한국기원의 존재가 알려지자 각지의 강자들이 한국기원에 들러 자기의 실력을 뽐내보는 양상이 벌어졌다. 그런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이 소년 김인의 일과였다. 손님들은 용맹스럽게 팔뚝을 걷어붙이고 대들었으나 번번히 소년 김인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1958년 봄. 한국일보사 주최로 전국아마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김인은 여기서 당당히 우승하여 조남철(당시 6단)과 3번기를 두는 영광을 얻었다. 치수는 두 점. 한 판이라도 이기도 싶었으나 김인은 간단히 2패를 하고 물러났다. 이듬해 가을. 김인은 드디어 프로 초단이 되었다. 동기생은 서울상대 재학생인 부산 출신의 강철민. 호남 국수 김명환의 아들인 김재구는 이미 그 해 봄에 입단한 터였고 조남철의 수제자 고재희는 입단 후보 「0순위」로 꼽혔으나 4년연하의 김인에게 뒤지고 말았다. 김인의 입단은 본격적인 10대 입단시대의 신호탄이었다. 백56으로 75의자리에 뛰어나가고도 싶지만 조남철은 실전의 56으로 대마 보강부터 서둘렀다. 백64로도 75의 자리에 움직일 수도 있는 문제지만 조남철은 참고 있다. 소년 김인의 강한 펀치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승일·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8/07 20:31 ◀ 이전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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