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3일] 율산 파동


갑자기 철 지난 찬바람이 불었다. 시중은행장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물러나고 한 명이 구속됐다. 촉망 받던 재무관료 L국장도 옷을 벗었다. 1979년 4월3일 신선호 율산그룹 회장의 전격 구속에 이은 후폭풍이다. 율산은 한국 기업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몰락한 기업. 27세의 친구 다섯 명이 단 3년 만에 굴지의 재벌을 이룬 신화와 영웅담을 남긴 기업이다. 성장비결은 집념과 아이디어. 중동에서 하역항구를 구하지 못하자 군용 상륙함(LST)을 동원해 해안에 화물을 내리고 화재가 발생한 선박은 우선 입항권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해 고의로 소형 화재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덕분에 율산은 1977년 1억6,500만달러를 수출하고 이듬해에는 종합무역상사 지정까지 받았다. 규모도 14개 기업에 종업원 8,000여명, 31개 해외지사를 거느린 재벌급으로 커졌다. 문제는 내리막길이 성장보다 급경사였다는 점. 사우디 수출 부진과 건설경기 침체, 의류상품권 살포 논란 속에 자금난에 빠져 결국은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세칭 ‘KS(경기고-서울대)’ 출신 청년들이 주도한 ‘무서운 도약’을 격찬하던 언론은 ‘헛된 꿈’ ‘모래성’이라며 논조를 바꿨다. 심지어 1,332억원인 대출잔액이 2조원대로 부풀려지기도 했다. 율산은 분명 무리한 확장으로 망했지만 그 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남아 있다. 왜 반역사건이나 간첩을 다루는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에서 경제사건을 맡았을까. 재무부 발표대로라면 담보가치가 대출보다 컸는데 왜 해체됐는가. 의혹은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수사 담당자는 물론 ‘율산은 특혜 없이 시장원리에 의해 성장한 최초의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율산맨들조차 ‘아직은 때가 이르다’며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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