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19일] 아우토반

[오늘의 경제소사/5월19일] 아우토반 권홍우 편집위원 1935년 5월19일 프랑크푸르트. 히틀러와 각료들의 차량이 꼬리를 물었다.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고속도로 준공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다. 구간의 길이는 30.6㎞에 불과했지만 시작이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은 패망할 때까지 3,819㎞의 아우토반을 뚫었다. 아우토반 총연장은 2004년 말 현재 1만2,044㎞에 이른다. 고속도로 건설은 히틀러의 1순위 경제정책. 자동차 전용도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논의됐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 불협화음과 빈약한 재정 탓이다. 히틀러는 달랐다. 장관급인 도로총감직을 신설해 아스팔트로 박사학위를 딴 전문가이자 심복인 프리츠 토트를 임명하고는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히틀러가 아우토반에 매달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병력ㆍ물자 수송과 경제난 타개를 위해서다. 기대대로 아우토반 공사는 세계 대공황의 와중에서 생산력 40% 감소와 실업난에 허덕이던 독일 경제를 구해냈다. 1935년 8만여명, 1936년에는 25만여명의 실업자가 투입됐다. 공사방법은 고온의 아스팔트를 붓고 인부들이 흙손으로 마무리하는 방식. 실업자 구제를 위해 기계보다는 인력에 주로 의존했다. 아우토반은 패망 독일도 건져 올렸다. 폴크스바겐과 더불어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일등 공신. 아우토반 덕에 독일 기업들의 국내 물류비용은 어느 나라보다도 저렴하다. ‘독일 제국이 번영을 누릴 1,00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도로를 만들자’는 히틀러의 독려가 먹혔기 때문인지 도로의 품질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4m의 중앙분리 구간을 포함해 폭 24m, 왕복 4차선의 아우토반은 전세계 고속도로의 모델로 자리잡았다.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도 1968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아우토반을 달려본 후 본격 추진됐다. 입력시간 : 2006/05/1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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