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KBS1, 고구려·신라 관계추적

『고구려는 대전지역과 경주 입구 냉수리까지 진출했었다.』KBS 1TV는 이번주 「역사스페셜」 시간에 기존의 통설을 뒤집는 주장을 내놓는다. 22일 오후 8시 방송. 이같은 주장의 근거는 충청북도 중원군 고구려시대 석비(石碑)에서 최근 새롭게 발견된 23자(字)에서 나온다. 지난 1979년 이 석비가 발견된지 20여년만에 첨단 적외선 촬영기법 등을 동원해 찾아낸 23개 글자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가 주종(主從)관계였고, 고구려가 중원을 한반도 남진기지로 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남쪽까지 진출하여 통치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3글자를 다시 읽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글자 가운데 「태왕」이라는 글자가 명확해지면서 비의 설립 목적과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글자가 없는 것으로 판명됐던 면에서 「전부대형」이라는 관직과 「巡(순)」자로 보이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서 이 비가 4면비였음이 밝혀진 과정을 추적한다. ◇고구려와 신라는 주종관계= 신라왕을 낮추어 부르는 말인 「매금」, 신라가 고구려에 예속됐음을 스스로 칭하는 표현인 「노객」이라는 표현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가 주종관계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신라왕이 고구려로부터 옷을 하사받는 대목. 의복을 받는 행위는 정치적인 복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비가 왜 중원에 있을까= 충주지역은 예로부터 철 생산의 중심지. 삼국은 모두 철기문화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철은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교통의 요지로서, 철 산지로서 중원은 고구려의 남진기지로 적합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중원고구려비가 이곳에 서 있는 것도 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대전지역과 경주 입구 냉수리까지 남진했다= 중원고구려비에서 발견된 「신라토내당주」라는 글자는 신라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말로 고구려의 간접통치를 증명해준다. 따라서 실제 고구려의 간접통치 지역은 이보다 더 넓은 신라 일원까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고구려의 남진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중원고구려비를 한반도의 중심에 세운 것이다. 문성진기자HNSJ@SED.CO.KR 입력시간 2000/04/2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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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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