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미식에 대한 예찬은 어느 때보다 깊고 열광적이다. 미디어는 온종일 '먹방(먹는 방송)'과 '쿡방(요리 프로그램)'을 틀어대고 인터넷에는 진지하게 맛집을 품평하는 블로거들로 즐비하다. '한 끼 대충 때우자'고 말했다간 인생의 재미도 모르는 따분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딱 좋다. 더불어 미식에도 유행이 있는데 요즘에는 단연 건강에 좋은 음식이 선호된다. 고기 하나를 먹어도 수입 산보다는 한우를 택해야 뭔가 아는 사람이 되고 바빠서 끼니를 햄버거 등 정크 푸드로 때운다면 내 몸에 미안해해야 할 지경이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감을 느끼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식에 열광하고 요리를 과잉 존중하는 이 분위기에 조금 지치진 않았나. 때마침 점점 허세를 더해가고 있는 음식 문화를 꼬집는 책이 나왔다. 영국의 칼럼니스트가 자국 음식 문화에 대해 쓴 글이지만 우리와 빗대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책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신랄하다. 좋은 음식을 챙겨먹는 행위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저자가 냉소하는 건 음식을 먹는 행위에 예술이나 이상향 같은 숭고한 가치를 덧씌우는 사람들. 저자는 이들을 가리켜 '푸디스트(음식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성차별주의자나 인종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편견 속에서 움직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푸디스트들은 좋은 음식을 잘 먹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올바르고 더 훌륭하며, 성(性)적으로도 더욱 근사하다고 여긴다. 그것만으로 그치면 좋으련만 이들은 음식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릇된 우월감마저 표출한다. 이를테면 당신과 당신 가족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당신이 좋은 음식을 챙겨 먹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국의 김치나 곱창전골처럼 이국적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음식을 통한 이 같은 계급·문화적 구분 짓기는 언어와 미디어를 통해 확장을 거듭한다. 일례로 저자는 영국 유명 레스토랑의 메뉴 중 하나를 소개하는데 이름 하여 '브론(Brawn)과 쥬니퍼를 곁들인 당근 자루와 프라이드 케이크, 크레스 어린 잎'이다. '당근'까지는 알겠는데 '당근 자루'가 뭔지 모르겠는 건 영국인인 저자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언어 전략은 평범한 요리에서 세련된 멋을 풍기도록 하는 한편 손님에게 식별력이라는 미묘한 안목을 갖춘 것처럼 믿게 만든다. 더불어 현대의 미디어는 섹스를 대체할 만한 자극으로 음식을 택한 것처럼 보인다. 방송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 지껄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눈으로 탐닉한다. 음식은 오늘날 광적인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빠져들어도 지탄받지 않는 유일한 영역 중 하나다. 과한 수준의 '먹방'과 '쿡방'을 '푸드 포르노'라 명명한 건 참으로 적절해 보이지 않는가.
음식에 대한 과도한 몰두, '푸디즘'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찬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결국 한 가지다. 음식은 음식일 뿐이라는 것. 아무리 우겨도 음식은 그 자체로 예술도, 구원도 될 수 없다. 책의 원제는 '당신은 당신이 먹는 음식이 아니다(You aren't what you eat)'다. 영국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먹는 대로 된다(You are what you eat)'를 비꼬았다. 아무렴, 우리 몸이 레고 블록도 아닌데 통닭을 먹었다고 통닭이 될 리는 없지 않은가.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