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수출의 '돈줄'인 수출입은행이 출범 이후 처음으로 내년도 수출금융 규모를 축소하는 것은 자금지원을 통한 수출증대가 분명한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출금융은 그동안 수출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왔지만 이제는 그 선순환의 고리가 약해졌음을 경제당국도 인정한 것이다.
지금의 수출부진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수요부족, 한계산업의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현상으로 수출금융이 곧 수출 확대로 이어지던 시대는 종식된 셈이다. 과거 한국 제품은 가격 대비 품질이 좋아 자금을 공급해주면 제품생산, 나아가 수출로 곧바로 연결됐다. 대외 정책금융기관인 수은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출부진에 이어 부실 여신의 상처까지 깊게 드리워진 수은의 기능 자체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수출금융 축소 직격탄이 된 조선업의 위기=수은의 금융지원 규모가 올해 80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후 내년 줄어들게 된 원인은 우선 조선업·건설업 불황 등 대외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수출지원은 크게 대출과 이행성보증으로 나뉘는데 내년도 대출 부문은 소폭 증가하지만 이행성보증은 10조원 가까이 크게 감소하면서 총 공급 규모가 줄게 된다. 이행성보증의 주요 항목은 해양플랜트다. 수은에 따르면 지난 2014년 선박수출기여도는 수은 업무의 69.2%에 달한다. 수은 업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업이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는 가운데 수은의 조선 플랜트 부문 이행성보증 축소는 대외 여건을 감안한 현실적 조치일 수밖에 없다.
실제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은 올해 해양플랜트를 단 한 것도 수주하지 못했다. 삼성중공업이 6건의 해양플랜트를 수주했지만 이 중 3건은 내년 하반기에 발주처에서 상황을 판단해 진행한다는 '조건부 계약'이었다. 수은의 한 관계자는 "내년도 금융지원을 줄인 것은 선박·건설 등 해외 수주가 여의치 않을 것으로 전망해 그 부문을 시장 수요에 맞게 현실화한 것"이라며 "구조조정 논의가 한창인 조선업계에 초유의 유가하락이 겹치는 등 내년도 조선업 불황을 고려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불황의 유형 변화도 수출지원 감소의 한 요인이다. 수출지원은 대내외 경제상황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과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오히려 더 증가했다. 난국을 수출로 타개하자는 정책 의지가 반영되면서다. 당시에는 국내 기업의 유동성 위기를 금융지원으로 메꾸면 수출로 판로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그에 따른 수요부족에서 오는 근본적 위기이기 때문에 과거와는 해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수은 역할 재정립 필요성도 제기=수출금융지원 효력이 예전 같지 않고 수은의 건전성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수은의 역할 재정립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수은은 1976년 설립된 이래 중화학공업 수출산업화와 수출금융지원 확대 정책, 1987년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수탁,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출신용보증그룹 참가국 회원가입 등 우리나라의 수출 발전상과 궤를 맞춰 비약적으로 발전해왔다. 수은 설립 당시 500억원이던 지원액은 이후 1997년 10조원으로, 2003년에는 그 두 배인 20조원이 됐다. 2007년 공급액이 40조원까지 증가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전문가들은 수출의 구조적 문제점이 불거진 상황에서 금융지원에 치중된 수은 역할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규모가 커지면서 정책금융기관 간 업무 중복, 시중은행과의 마찰 등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특히 지원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는 여신심사로 리스크 관리능력도 현저히 저하됐다는 지적이다.
수은도 이를 의식해 지난해부터 금융지원 항목에 서비스업을 추가해 올해 2조6,000억원을 지원하는 등 새로운 먹거리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윤석헌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은은 수출입, 해외 투자, 해외 자원 개발 등 대외경제 협력에 필요한 금융 제공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후 지원영역의 큰 틀에 변함이 없다"며 "하지만 경제여건이 완전히 변한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프레임으로는 지금과 같은 위상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