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사람의 공감능력은 꽃보다 아름답다

상대가 극한 고통에 처했을 때 자신의 실익부터 따지기보다

정운 스님1

일전에 인터넷을 통해 감동을 주는 내용을 접했다. 미국 미시시피주에서 엄마와 아이 셋을 태운 차량이 교통사고가 났는데 얼마나 사고가 컸는지 사람들이 차량 밖으로 튕겨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척추를 다친 엄마는 중상이었고 아이들도 고통을 호소했다. 다행히도 소방관들이 빨리 도착해 사고 현장을 잘 수습하고 환자들을 이송했다.

그런데 환자들을 이송하기 전과 이송하는 과정에서 감동과 배려를 주는 장면이 있었다. 소방관 케이시는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고통과 불안으로 울고 있는 네살배기 아이 옆에 함께 누워 스마트폰으로 '넌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애니메이션 '해피피트(Happy Feet)'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른이 어린 꼬마의 눈높이에 맞춰 두려움을 진정시킨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어린아이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이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람들에게 퍼져나가 가난한 환자들에게 후원금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몇 년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봤다. 부모와 다섯 살 아이가 타고 있던 차량이 전복돼 부모는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았다.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한 경찰관이 아이에게 부모의 처참한 시체를 보지 않게 하려고 아이를 안고 하늘을 가리키면서 아이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는 장면이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의 뇌리 속에 각인돼 있다.

신라 시대 원효 스님에게도 이런 일화가 있다. 원효 스님과 매우 가까이 지내는 대안 스님이 있었다. 원효 스님에게 대안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원효 스님이 대안 스님을 만나기 위해 굴로 찾아갔다. 그런데 대안 스님은 없고 너구리 한 마리가 죽어 있는데 새끼 너구리가 죽은 어미 곁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원효 스님은 죽은 너구리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아미타경(불교에서 고인을 위해 읽어주는 경전)'을 큰 소리로 독송했다. 그런데 새끼 너구리는 더 크게 울부짖었다. 이때 대안 스님이 들어와 원효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원효 스님은 당연히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여기 와서 보니, 새끼 너구리가 죽은 어미 곁에서 구슬프게 울기에 죽은 너구리를 위해 왕생극락하라고 염불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대안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 새끼 너구리가 경을 알아듣겠소……."

대안 스님은 동냥해서 얻어온 젖을 너구리에게 먹이며 원효 스님에게 말했다.

"이것이 너구리가 알아듣는 '아미타경'입니다."

새끼 너구리는 어미가 죽어 슬픈 것보다 배가 고파서 고통 받고 있으니 먼저 배고픈 고통부터 해결해주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의 이익됨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늘 다툼과 분쟁으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스의 신탁에 "상처받은 자가 치유하리라!"라는 문구가 있다. 공감이 상처를 치료하는 데 뜻깊은 단어임을 내포한다고 본다. 하여튼 자신을 위해서든 타인을 위해서든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의 처지에서 공감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삶이 뭐 별것이겠는가? 사람 간의 따스한 마음, 상대를 품어 안는 감정에 대한 공유가 인생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맞장구쳐줄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요, 이런 자가 바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정운스님·동국대 선학과 외래교수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