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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 경제블록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 소식이 전해진 지난 5일. 우리 정부는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의 최고 우등생'에서 '다자 간 경제통합 시대의 지각생'이라는 드라마틱한 위상 추락을 받아들여야 했다. 정부는 양자 FTA에서 불굴의 척후병이었지만 세계 무역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는 둔감했다. 개별 FTA의 전리품(실익)을 챙기느라 글로벌 통상환경의 핵심축이 양자 FTA에서 다자 메가 FTA로 옮겨가고 있는 흐름을 놓친 것이다.
메가 FTA에 대한 대응이 부실했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2013년 6월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신통상정책 로드맵'이 나온다. 신통상정책은 △동시다발적으로 체결해온 양자 FTA의 실효성을 높이고 △FTA를 통해 지역통합의 중심 핵심축(린치핀)이 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는 'FTA 허브경제 구축'을 모토로 내걸었던 이명박 정부의 통상정책을 이어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 것으로 요동치는 글로벌 통상환경에 기민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최경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는 "재편되고 있는 통상질서에 선제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중 FTA를 최우선 추진하고 다른 국가와도 FTA 체결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일본이 이보다 3개월 앞선 2013년 3월 TPP 참여를 공식화하면서 TPP 논의에 힘이 붙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통상전략 다변화 측면에서 'TPP를 성급히 배제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김학도 통상교섭실장은 "한미 FTA 비준과 한중 FTA 협상이 가시화하는 시점이었던 터라 TPP 참여 결정이 힘들었다"고 설명했지만 메가 FTA의 흐름을 놓친 전략적 실책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오판은 중국에 이어 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과 양자 FTA를 잇따라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고도 TPP 타결로 경제블록 전쟁에서 뒤처지게 된 현실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메가 FTA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정교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한중일 FTA를 비롯해 중국판 TPP로 불리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TPP 등 3대 메가 경제블록 협상에서 국익을 최대한 끌어내지 못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FTA를 체결했거나 협상 중인 국가만 60개에 육박할 정도로 양자 협상에 앞선 것이 빌미가 돼 거대 FTA의 파급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며 "기존의 정책 패러다임에만 얽매인 탓에 세계 경제의 통합 환경을 놓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이 유럽공동체(EC) 초기에 가입하지 못해 EU에서 영향력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도 원년 멤버로 가입하지 못한 비용을 지불해야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통상 전문가들은 다자 FTA가 양자 FTA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가령 여러 나라와 동시에 FTA를 체결할 때 국가별로 원산지 조항이나 세부 기준이 서로 얽히고설켜 FTA 활용률이 저하되는 것을 의미하는 '스파게티 볼 효과'도 해결이 가능하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박사는 "만약 TPP에 가입했다면 12개 TPP 회원국에 단일 원산지 기준이 적용돼 스파게티 볼 효과는 바로 정리된다"며 "이뿐만 아니라 다자 FTA는 다수의 양자 FTA로 초래되는 거래비용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안이한 현실 인식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간 통상 관료들은 TPP 내 뜨거운 감자로 통하는 '누적 원산지' 규정, 각국의 상이한 이해관계 등을 이유로 TPP 회원국이 쉽게 타결에 이르지는 못할 것으로 관측해왔다. 이제 한국은 TPP를 외면하자니 누적 원산지 규정 등에 따른 산업 피해가 우려되고 가입하자니 입장료를 후하게 쳐줘야 하는 딜레마와 맞닥뜨리게 됐다.
다자협상에 과부하가 걸리게 된 점도 부담이다. RCEP을 비롯해 한중일 FTA에 TPP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상태다. 만약 TPP에 참여한다면 패권 전쟁 중인 G2 사이에서 중국에 쏠린 추는 균형감을 갖게 됐지만 협상의 중요도 등을 따져 전략적 우선 순위를 정립해야 한다.
바야흐로 TPP가 FTA 우등생 한국의 통상 외교 수준을 시험하는 진정한 무대가 되고 있다.
/세종=이상훈기자 sh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