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224> “행복은 우울한 얼굴의 천사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화가다. 19세기 말엽 파리를 중심으로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때 샤갈, 피카소, 브랑쿠시 등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역시도 다른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몹시 가난했지만 열심히 작업을 하고 동료들과 교제를 해야만 생활의 유지가 가능했던 ‘복잡한 파리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화려함과 초라함, 단순함과 복잡함 등의 극과 극이 맞부딪치는 상황은 심약한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모딜리아니에게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가 동료 작가들에게 자신의 그림이 담긴 엽서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종합병동’이나 다름없이 심신이 허약했던 그에겐 상당히 적극적인 소통 방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모딜리아니는 어느 날 자기 친구에게 짤막한 문장으로 된 엽서를 보냈다. “행복은 우울한 얼굴의 천사다.”


행복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믿는 상태가 있을 뿐인 것일까? 모든 상황은 사람들이 인식하기 나름이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모두가 ‘그렇다’고 합의한 결과라는 시각이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실재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조차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이야기한 내용, 그리고 스스로가 겪었던 경험들이 얽히고설켜서 객관적인 듯 주관적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행복과 불행은 이분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한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행복함을 인지하게 되고,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나쁜 일도 몰려 올 수 있음을 인지하는 균형적인 감각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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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행복해서 슬프다’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불리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내용도 그렇지 않던가. ‘조이(기쁨)’와 ‘새드니스(슬픔)’가 같은 기억의 양면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긍정과 부정의 정서가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삶을 보면, 도대체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냥 사람들은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 뿐, 절대적으로 기쁘고 즐거운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모딜리아니가 이야기했듯 행복과 우울함은 늘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양가적(Ambivalence)인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제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견뎌낼 수 있다는 용기, 위안을 얻는다. 행복의 뒷면이 슬픔인 것처럼, 슬픔의 뒷면도 행복일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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