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1월 6일 오전 9시, 모로코 남부 도시 파르타야. 여성 2만여명을 포함한 35만명의 민간인들이 국경을 넘었다. 목적지는 스페인령 사하라. 모로코 국기와 코란을 든 행렬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식민통치자 물러나라’ ‘조상의 땅을 되찾자’.
비무장 민간인들이 40℃가 넘는 열사의 땅으로 들어간 이유는 식민지 처리방식에 대한 불만. 강탈한 사하라를 돌려달라는 요구에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스페인의 역제안이 먹혀들어 자칫 분리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모로코 국왕 하산 2세가 들끓는 민족주의 감정에 불을 지폈다.
국경에 지뢰 2만개를 살포했다는 스페인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행렬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차량 1만여대를 포함한 행렬의 길이만 120㎞. 국경을 넘어 25㎞를 행진한 행렬이 스페인 진지 앞에서 멈춰 거대한 ‘텐트 시티(tent city)’를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갔을 때 제국주의 잔재를 비난하는 전세계 여론이 들끓었다.
마침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사경을 헤매던 즈음, 거대한 행렬에 질리고 국제여론에 눌린 스페인은 결국 손을 들었다. 대행진 8일째인 11월 14일, 사하라 식민지를 모로코와 인접국 모리타니에 넘긴다는 마드리드협약을 맺었다. ‘녹색 행진(Green March)’이라는 이름을 얻은 대행렬도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랍어로 ‘마씨라(Masira·도전)’으로도 불리는 사하라 대행진의 기획 연출은 모로코 국왕 하산 2세. 1961년 즉위 이래 1999년 사망할 때까지 ‘가장 역동적인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던 하산 2세(당시 36세)는 인기 만회책과 민족주의 감정이 결합한 결과가 사상 초유의 사막 대행진으로 이어졌다.
인권 유린과 야당 탄압으로 추락한 대중적 지지를 끌어 올리기 위한 일련의 정책(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 영해 12해리의 70해리로 확대 선언)을 펼쳤던 하산 2세는 사하라 대행진 카드로 다진 대중적 인기와 절대 권력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사망 1년 전 평생의 정적을 야당의 거두를 총리로 지명하는 포용책 덕분인지, 사하라 대행진의 영향이 살아있기 때문인지 모로코인들은 하산 2세를 뛰어난 군주로 기억한다.
문제는 새로운 분쟁이 잉태됐다는 점.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이다. 미국은 친서방적인 모로코를 지지, 사하라 대부분을 몰아줬지만 스페인은 분리독립을 원하는 사하라해방전선(SADRㆍ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을 뒤에서 지원했다. 지하자원채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스페인군이 이듬해 초 철수한 뒤 모로코와 SADR는 주민투표에 수차례 합의하고도 투표 대상 선정에 관한 이견으로 지금껏 동족 간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군이 1994년에 유엔 평화유지군(PKF)의 일원으로 파병된 적도 있는 이 지역에는 여전히 긴장이 흐른다.
우리 땅을 찾자는 민족적 열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사하라 대행진으로부터 40년. 첨예한 갈등을 낳았던 현실적 이유인 땅에 묻힌 자원은 변함이 없다. 비료의 원료이자 우라늄을 추출할 수 있는 인(燐)광석 세계 매장량의 70%가 이 부근 사막에 깔려 있다. 철광석도 풍부하고 석유부존 가능성도 높다.
바뀐 것도 크게 두 가지 있다. 첫째, 지역의 패권을 뒤에서 조종했던 세력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미국과 중국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둘째,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2008년 창설한 아프리카 사령부를 중심으로 군사적 대응 태세를 높여가고 중국은 자본력을 앞세워 광산을 싹쓸이하고 있다. 정녕 돈과 자원을 둘러싼 세력 다툼은 인간의 본성일까./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