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냉장고









냉장고-이재무 作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녀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설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 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러댄다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밥은 먹고 다니냐? 시원한 두유 줄까? 싱싱한 과일 줄까? 꽃무늬 일바지 뒤적여 원하는 모든 걸 내어주었지. 24시간 일하고 밤새도록 울어도 귓등으로 들었지. 그녀가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나면, 평생 참았던 가슴속 얼음이 추깃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비로소 후회하기 시작하겠지. '현비유인삼성냉씨신위' 지방을 써 붙이고 생전의 불효를 뉘우치며 통곡하겠지. 때늦어 후회하지 말고 살아 있는 냉장고에게 효도하자.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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