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사우디-이란


이란의 청명한 상공에 갑자기 수백 대가 넘는 수호이와 미그 전투기가 나타났다. 이들의 목표는 이란 수도 테헤란 등 10곳의 공군 비행장. 곧이어 융단 폭격이 이뤄졌다. 1980년 9월22일의 일이었다. 이튿날에는 이라크 지상군이 1,300㎞에 달하는 국경선을 뚫고 일제히 밀려들었다. 무려 8년을 끈 이란-이라크 전쟁의 서막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수니파가 다수인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만 국가들은 이라크 지원에 팔을 걷고 나섰다. 전쟁이 아니라 더한 수단을 써서라도 시아파인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의 불길이 자기 영토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우디로 대표되는 수니파와 이란을 맹주로 한 시아파가 전쟁까지 불사하게 된 이유를 알려면 시간을 서기 632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두지 않고 죽자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났고 곧이어 잔혹한 죽음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였던 알리 이븐 아비와 일족을 따르는 무리가 권력 싸움에서 밀려 수니파에서 떨어져 나갔다. 시아파란 '시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카피르(kafir·배신자)'라 부르며 죽고 죽인 것도 결국 1,400년에 걸친 권력 투쟁의 핏빛 재앙일 뿐이다.

사우디가 3일(현지시간) 이란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사우디가 반정부 시아파 인사 4명을 포함한 테러 혐의 사형수 47명에 대한 형을 집행한 것에 반발해 이란 시위대가 사우디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 극단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종파 간의 뿌리 깊은 갈등과 중동 패권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이 발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사우디 입장에서 유가 급락과 예멘 내전의 장기화에 따른 재정난, 국내 민주화 운동 확대 등에 따른 왕정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터. 역시 종교는 최고의 정치 도구다.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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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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