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창백한 피부와 몽환적인 눈빛. 이름만으로도 스산한 ‘뱀파이어’가 무대에서 깨어난다. 불멸의 존재와 인간의 사랑을 그린 연극 ‘렛미인’과 뮤지컬 ‘드라큘라’는 23일 동시 개막하며 극과 극의 설정으로 2색의 핏빛 판타지를 펼친다.
“들어가도 돼(Let me in)?” 동명의 스웨덴 영화를 원작으로 한 ‘렛미인’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10대 소년 오스카와 뱀파이어 소녀 일라이의 사랑을 그린다. 뮤지컬 ‘원스’로 친숙한 존 티파니가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군살 없이 잘 빠진,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간단한 소품이 공간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무대를 크게 두 개 공간으로 나눠 장면과 장면을 매끄럽게 연결하고, 소품의 이동도 연기의 한 부분으로 녹였다. 아이슬란드 출신 뮤지션 올라퍼 아르날즈의 음악을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다. ‘brim’, ‘til enda’ 등 차갑고 음울한 음악은 이 연극의 정서와 맞아 떨어진다. 잔잔히 흐르던 선율은 어느 순간 거침없이 몰아치며 공간·정서적 공포를 고조시킨다. 그 속에서 마치 춤추는 듯한 배우의 독특한 동작도 눈길을 끈다. 이 극에서 움직임은 ‘또 다른 언어’로서 고독·분노·슬픔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신비한 극의 분위기와 대체로 어울리지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동작이 거슬린다는 의견도 있어 호불호는 갈릴 듯하다. 전반적으로 원작의 드라마와 분위기를 잘 담아냈다. 일라이 역으로 연극까지 진출한 충무로 신예 박소담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일라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인간 ‘하칸’의 마지막 때문일까. 결말은 내내 먹먹하고 이 계절처럼 시리다. 2월 28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원한다면 들어오시죠.” 드라큘라 백작의 서늘한 음성이 울려 퍼지면 조명, 음악, 무대가 총동원돼 음산한 기운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옛사랑을 닮은 여인 ‘미나’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는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수식어는 ‘화려함’이다. 뮤지컬 흥행 배우 김준수가 지난해 초연에 이어 주연을 맡았다. 여기에 4개의 원형 무대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순식간에 공간을 교체하는 이른바 ‘4중 회전 무대’도 극 초반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번 공연에선 초연 당시 지적받은 후반부를 손봐 스토리가 한결 매끄러워졌다. 초연에서는 ‘모두가 원하는 불멸의 삶을 주겠다’고 미나를 유혹하던 드라큘라가 갑자기 ‘당신을 어둠 속에 살게 할 수 없으니 날 죽여달라’고 울부짖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재연에서는 백작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계기를 추가해 이음새를 보강하고 결말의 설득력을 높였다. 2월 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