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요즘 작가라는 타이틀로 활동하고 있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게스트로 출연해 이런 말을 했다. ‘자기 소개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PR의 기본이다. 상대방의 코드에 맞추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누구나 원하는 자기만의 이미지가 있겠지만, 다른 이에게 기억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면 그의 언어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냥 강요 또는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다.
요즘 선거판을 봐도 그렇다. 피상적으로 보면 정말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아 보인다. 이토록 멋진 ‘스펙’을 가진 예비 정치인들이 선수로 등장하는 총선도 없었던 것 같다. 외국 대학을 나온 해외파 인재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화려한 공직 경험을 지닌 사람, 금융사 CEO 출신 인사까지 종합선물세트처럼 선거판에 나왔다. 여러 고장에서 난 먹거리가 풍성해 보이는 백화점 시식 코너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비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사무실에 걸린 현수막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메세지가 한결같다. ‘기분좋은 변화’, ‘정정당당’, ‘잘 사는 XX구’. 이 슬로건들은 분명 20년 전에도 봤었을 법한 구호들인데 아직까지 후보자들을 상징하는 문구로 나오고 있다. 남들과 똑 같은, 그것도 수 십 년 간 울궈 먹은 캐치프레이즈가 사용되고 있다면, 그의 지적 수준을 한번 의심해 봐야 한다. 공부를 안하고 있거나, 아니면 선거를 이미 내 왔던 음식 재활용하는 수준의 판으로 오인하고 있거나.
정치인이 자기 철학과 소신을 간명한 문구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적어도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생각과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온 마음과 혼을 다해 피를 토하도록 자기 이야기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다른 선거구에서도 쓸법한 공약과 구호를 갖고 이 지역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이기주의다. 자격이 의심스럽다. A라는 연극을 상연하고 있는데 배우가 옛날에 외운 B라는 작품의 대본을 읊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지금 우리네 선거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설픈 선무당 점을 한번 쳐 보려 한다. 올 4.13 총선은 철저히 ‘맞춤화’선거가 될 거라고 말이다. 현역 교체 요구가 다른 때에 비해 유난히 높고, 유권자의 명확한 요구를 발견하기 어려운 때다. 이런 판에서는 정치인 자신이 아니라 표를 주는 사람들의 상황과 맥락을 읽을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한 법이다. 지역마다 특색화된 전략, 마케팅 방법으로 스스로를 스타일링하려는 노력 없이는 1표도 가져가지 못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이미 선거판은 난전이다. 거물급 야권 정치인이 나온 지역구에 방송에서 이름을 알린 청년 보수 정치인, 그리고 야권 청년 운동을 선도해 온 인물 등이 어우러져 누가 승기를 거머쥘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누가 어디에 나온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정작 중요한 ‘각각의 이야기’는 무엇인지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차별화된 철학과 정책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현상이 다른 동네에서도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후보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정치를 시작하려는 분들께 이야기하고 싶다. 적어도 자기 생각을 한 두 단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치를 때깔 좋은 전문직 쯤으로 여기고 선거판에 나왔다면 자격 미달이라는 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