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카카오 10주년 ‘거대한 성공’의 비밀

김범수의 남다른 관점과 승부수모바일 플랫폼 기적을 창조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에릭 슈미트, 마크 저커버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IT업계에서 성공한 CEO? 물론 맞는 얘기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 모바일 메시지 애플리케이션 하나로 시장의 패러다임을 새로 쓴 인물이 있다. 바로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다. 지난 2006년 카카오의 전신 아이위랩을 창업한 김범수 의장은 불과 10년 만에 카카오를 온라인·모바일을 아우르는 국내 대표 IT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포춘코리아가 김범수 의장이 써 내려간 10년의 카카오 성공 신화를 들여다봤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죠.” 지난 2007년 9월, 김범수 카카오 의장(당시 NHN 공동창업자)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이 만들고 키운 NHN을 떠났다. 이해진 네이버 의장과 의기투합해 NHN을 공동 설립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김 의장의 사임을 ‘충격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NHN과 한게임의 사업역량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었다. 김 의장의 능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제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NHN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업계 전반에서는 김 의장을 인정받는 경영자, 존경받는 창업자, 자수성가한 벤처 1세대의 대표주자로 불러왔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연히 NHN을 떠났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는 평가 속에 다양한 소문도 흘러나왔다. 한게임으로 대표되는 소위 ‘게임파’가 네이버의 ‘검색파’에 밀렸다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김 의장을 잘 아는 주변 인물들은 당시 그의 결정이 ‘김범수다운 결정’이라고 평가한다. 지난 1999년 김 의장과 함께 한게임을 창업했던 핵심 멤버 A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김범수 의장은 전형적인 모험가 스타일의 사업가입니다. 언제나 도전에 목말라했죠. NHN 퇴사 당시에는 그의 몸속에서 꿈틀대는 모험가 기질이 절정에 달했을 겁니다. 왜일까요? 생각해보세요. 당시 김 의장의 역할은 조직의 관리자였습니다. 물론 새로운 사업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그의 주된 업무는 조직 관리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김 의장이 자신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요? 새로움에 대한 갈망, 도전에 대한 욕구는 NHN 퇴사라는 결과로 이어졌죠. 물론 막연한 도전정신만으로 퇴사를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모바일’이었습니다.”

A씨의 말처럼 김 의장의 도전은 항상 철저한 계산과 확신 속에 이뤄졌다. 지난 1997년 삼성SDS를 나와 1999년 한게임을 창업한 것도, 다시 NHN을 나와 모바일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출사표를 던진 것도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을 줄 아는 김 의장의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 실패와 도전의 반복
김범수 의장은 지난 2006년 NHN의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자본금 80억 원으로 아이위랩(iWelab)을 창업한다. 나(I)와 우리(We)라는 단어에 실험실(Laboratory)이라는 단어를 합성한 사명이다. 당시 아이위랩은 특별한 사업 아이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명에 담긴 ‘실험실’이라는 단어처럼, 인터넷상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김범수 의장, 그리고 아이위랩의 첫 도전은 미국 시장에 선보였던 ‘부루닷컴’에서 출발했다. 부루닷컴은 일종의 집단지성을 활용한 서비스다. 개인 사용자가 주로 검색하고 얻어가는 정보를 취합해 일종의 리스트로 만든 뒤, 이를 모든 사용자와 공유하는 방식의 아이템이었다. 200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는 웹 사용자들의 참여, 공유, 개방을 기반으로 한 ‘웹 2.0’이 거대한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김 의장은 웹 2.0의 핵심 요소를 부루닷컴에 담아 서비스를 선보이면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김 의장의 계산은 아쉽게도 빗나갔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서비스였기 때문이었을까? 부루닷컴은 시장에 자리 잡지 못한 채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된다.

인터넷업계 관계자 B씨는 부루닷컴 실패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슨 사업이든 처음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내기는 힘듭니다. 물론 서비스 초기에는 ‘이런 것도 있어?’라는 호기심을 보이죠. 하지만 이러한 호기심을 확신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결코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당시 부루닷컴은 미국 시장에서도 보기 힘든 꽤 혁신적인 서비스였어요.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일까요? 어쨌든 당시 부루닷컴의 실패는 김 의장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했을 겁니다. 바로 기획의 중요성이었죠.”

절치부심한 김 의장은 부루닷컴 실패 이후, 또 다른 웹 2.0 기반 서비스인 ‘위지아닷컴’을 선보인다. 위지아닷컴은 당시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큰 인기를 끈 ‘네이버 지식인’ 서비스에서 착안한 플랫폼이었다. 사용자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면 이에 대한 답변을 달고, 이를 랭킹화해 노출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김 의장은 부루닷컴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시장에 접근했다. 우선 미국이 아닌 국내 시장에서 먼저 서비스를 시작했다. 기존 네이버 지식인에 흥미와 재미라는 요소를 더한다는 나름의 차별성도 내세웠다. 하지만 위지아닷컴 역시 부루닷컴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실패한다.

김범수 의장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재충전을 위해 1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떠난다. 단순히 휴식 차원의 휴가만은 아니었다. 아이위랩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동시에 그가 NHN을 나오며 떠올렸던 모바일에서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의 등장
그가 안식년 휴가를 떠날 당시, 아이위랩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사실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의 실패가 아이위랩의 재무상황 악화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김 의장은 소위 벤처 갑부로 불릴 만큼 많은 돈을 가진 인물이다. 몇 개의 서비스가 실패했다고 해서 회사가 망할 일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직 내부의 사기 저하였다. 야심 차게 내놓은 서비스의 연이은 실패로 직원들의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다. 소위 IT업계에서 잘나가던 개발자들이었기에, 그래서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왔기에 그들의 상실감은 더욱 컸다. 김범수 의장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방향을 찾는 데 집중했다.

우선 김 의장은 안식년 동안 아이위랩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분명 부루닷컴과 위지아닷컴은 최고의 개발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 의장은 기획력의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서비스 기획력이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 그것이 김 의장이 분석한 아이위랩 정체의 이유였다.

결론이 서자 김 의장은 즉각 내부에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그가 예견했던 ‘모바일 시대’에 걸맞은 서비스 개발을 위해 세 개의 프로젝트팀을 새롭게 구성했다. 그리고 각각의 팀에게 모든 서비스 기획 · 개발 권한을 일임했다. 팀장을 중심으로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모바일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그가 각 팀에 제시한 개발 완료 마지노선은 고작 두 달이었다.

권한은 위임했지만 큰 방향성은 본인이 직접 제시했다. 김 의장은 모바일에 부합하는 플랫폼, 특히 모바일 시대의 도래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를 주목했다. 당시 대다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자와 기업들은 ‘첨단 기술력이 집약된 혁신적인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최첨단 기기인 만큼, 이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에도 엄청난 기술력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 의장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첨단 기능과 휴대성이 접목된 스마트폰에서 과연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대다수 사람의 생각처럼 더욱 새롭고 혁신적인 서비스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관점을 틀어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바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김 의장은 인터넷 시대에서 검색 서비스가 핵심이었다면, 모바일 시대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윽고 약속했던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폰 전용 마이크로블로그(사진, 동영상, 짧은 문구로 소통하는 소규모의 SNS) 서비스 ‘카카오수다’, 인터넷 · 스마트폰 연동 실시간 그룹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카카오아지트’, 그리고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 세 가지 서비스는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모두 ‘카카오’라는 이름을 서비스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카오(Kakao)는 초콜릿 원료로 쓰이는 식물인 카카오(Cacao)를 의미하는 독일어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마치 초콜릿의 달콤함과 같다는 의미를 담아 모든 서비스 이름에 ‘카카오’를 붙였다.

마침내 지난 2010년 초, 김 의장과 아이위랩 관계자들은 자식을 물가에 내놓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카카오 삼총사’를 시장에 공개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절박했다. 물론 자신감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감 역시 그저 막연한 기대일 뿐이었다.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대박이 났다. 특히 카카오톡은 출시 한 달 만에 5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놀라운 점은 이 같은 수치가 오롯이 아이폰 사용자 사이에서만 발생했다는 점이다. 2010년 당시 국내 아이폰 사용자가 약 80만 명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아이폰 사용자의 무려 70%가 카카오톡을 사용했다는 의미다.

당시 시장에는 카카오톡과 유사한 서비스가 이미 출시돼 있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와츠앱’과 국내 기업 인포뱅크가 만든 ‘엠엔톡’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카카오톡이 이들 경쟁 플랫폼을 제치고 시장 선두로 나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관점의 차이가 성공을 이끌다
카카오톡이 경쟁 서비스를 따돌릴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서비스 안정화다. 엄청난 양의 트래픽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안정화가 필수다. 김 의장 역시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 한게임 운영 시절, 트래픽 과부하로 인한 서버 마비 사태를 수 차례 경험했다. 물론 트래픽 과부하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사전에 100% 차단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미리 대비한 상황에서 문제에 직면하는 것과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차이가 있다.

특히 김 의장은 카카오톡을 ‘수익 플랫폼’이 아닌 ‘서비스 플랫폼’으로 바라봤다. 쉽게 말해 일단 카카오톡을 무료로 풀어 사용자를 끌어모은 뒤, 이후 발생하는 트래픽이 일정 수준에 오르면 차후에 수익 모델을 덧붙이겠다는 계산이었다. 이처럼 카카오톡의 1차 목표가 가급적 많은 트래픽을 유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비스 안정화는 목표 달성을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

두 번째 요인은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사용자 환경(UI · User Interface)이었다. 깔끔하면서도 단순한 사용 환경을 제공해 이용자들의 편의성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여기서 김 의장의 또 다른 ‘신의 한 수’가 나온다. 카카오톡 하면 떠오르는 색상, 바로 ‘노란색’을 카카오톡 서비스 전반에 접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카카오톡이라는 서비스를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고 가정해보자. 들고 있는 붓에 묻힐 첫 번째 색상은 무엇일까? 상당수는 아마 노란색을 선택할 것이다. 노란색 배경에 검은색 말풍선, 카카오톡 로딩 중 등장하는 이 화면은 카카오톡이 국민 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숨은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카카오톡 개발과정에 참여했던 개발자 C씨는 말한다. “원래부터 노란색은 주목도가 높은 색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통 표지판이나 건널목 등에 주로 사용되는 색상 역시 노란색이죠. 당시 개발진 사이에서는 단순한 UI에 주목도가 높은 노란색을 더한다면 사용자의 편의성을 높일 수 있겠다는 의견이 상당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란색을 선택한 건 성공적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당시 결정이 신의 한 수였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이후 노란색은 카카오 브랜드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색상으로 자리매김하게됐죠. ‘카카오=노란색’ 이라는 공식을 사용자들 머릿속에 각인시켰다고나 할까요.”

카카오톡의 성공은 김범수 의장을 일약 모바일 시대의 대표주자로 이끌었다. 단순한 사업가를 넘어 ‘혁신의 아이콘’, ‘IT 강국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로 불리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김 의장, 그리고 카카오톡의 성공 비결에 대한 보도를 쏟아냈다. 과연 김 의장이 생각하는 카카오톡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항상 ‘관점의 차이’를 강조했다.

과거 김범수 의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올드보이’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대수는 누군가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감금되죠. 무려 15년 동안이요. 15년 후 풀려난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이우진에게 ‘왜 나를 가뒀냐’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오죠. 이우진은 말합니다. ‘당신이 틀린 질문만 하니까 틀린 답만 찾는 거잖아. 왜 가뒀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냐를 물어봐야지’라고 말이죠.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순간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왜 가뒀는지를 궁금해했던 저에게 풀어준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대사는 꽤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해결방법도 달라진다는 것, 같은 것을 바라봐도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 ‘모바일 넘버원’ 카카오 시대의 개막
카카오톡의 성공은 김범수, 그리고 아이위랩을 또 한 번의 변화로 이끌었다. 기존에 운영해온 카카오수다, 카카오아지트를 접고 카카오톡 하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당시 스마트폰 시장의 변화에 따른 결단이었다.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된 2009년 말 이후부터 스마트폰 시장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국내 단말기 제조사들의 도전이 시작됐다. 안드로이드 OS 기반의 스마트폰 출현은 또 다른 경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지난 2010년 6월 갤럭시S가 출시된 이후 국내에서 본격적인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의 무한경쟁 속에 카카오톡의 다운로드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지난 2011년 3월 카카오톡이 출시된 지 정확히 1년 만에 1,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데 이어 그해 연말에는 3,000만 다운로드를 돌파했다. 외국 시장에서도 조금씩 카카오톡에 주목하며 의미 있는 수준의 트래픽과 다운로드가 발생했다.

김 의장은 카카오톡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모바일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으로 2010년 9월 아이위랩이라는 사명을 아예 카카오로 변경했다. 이는 본격적인 ‘카카오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결정이었다.

카카오로 사명을 바꾸고 난 뒤, 창업자 김범수는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카카오 이사회 의장으로서 사업 이슈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의장직에 오른 김범수가 맞닥뜨린 첫 번째 과제는 바로 무료 음성통화 서비스 ‘보이스톡(Voice Talk)’의 도입이었다.

당시 카카오 내부에서는 보이스톡 서비스를 놓고 갑론을박이 거셌다. 이미 경쟁 플랫폼에서 무료 음성통화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만큼 카카오가 먼저 시장을 꿰차야 한다는 의견과 통신사와의 관계를 고려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논의가 시작된 시점에서 김 의장이 밝힌 의견은 ‘기다려 보자’였다. 통신사와의 마찰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과연 소비자들이 무료통화라는 서비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느냐를 따져봤다. 그리고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무료통화의 필요성이 사용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자 김 의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난 2012년 6월 카카오톡 플랫폼에서 보이스톡 서비스를 선보였다. 파장은 거셌다. 특히 통신사의 반응은 예상대로 날카로웠다. 급기야 망 접속 제한, 요금체계 변경 등 보이스톡을 압박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김 의장은 이러한 통신사의 반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이 확고하다면 외부의 압력에도 꿋꿋이 일을 추진하는 김 의장의 경영 스타일이 제대로 드러난 부분이다.

카카오 내부 사정에 정통한 IT업계 관계자 D씨는 말한다. “김범수 의장이 보이스톡 서비스를 강행한 이유는 딱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보이스톡을 원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김 의장은 이 문제를 가장 단순한 방향으로 접근했다고도 볼 수 있죠. 비싼 전화요금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소비자들은 당연히 무료 통화 서비스를 원했고, 이를 해결해주는 서비스를 선보이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실 보이스톡 상용화 이전, 심지어 상용화 이후에도 카카오 내부에서는 꾸준히 논쟁이 이뤄졌다고 해요. 계속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죠. 이때 마다 김 의장이 직접 논쟁을 중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했죠. ‘내 결정을 믿고 따라와 달라’고 말입니다.”

보이스톡에 이은 두 번째 과제는 바로 수익 모델 창출이었다. 김 의장은 평소 ‘서비스는 무료로, 콘텐츠는 유료로 공급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카카오톡을 무료로 서비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후 카카오톡 서비스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수익모델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여기서 그는 또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연결한다’, 이른바 ‘커넥트 에브리씽(Connect Everything)’의 비전을 기반으로 수익원 창출에 나선 것이다. 쉽게 말해 카카오가 직접 개발한 콘텐츠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 제작자와 연계해 콘텐츠를 팔거나 서비스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거기에서 수익을 만들어내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이 전략은 모바일 메신저를 넘어 보편적 모바일 생활 플랫폼으로 나아가겠다는 카카오톡의 방향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줬다.

이후 카카오톡은 이모티콘, 게임, 소설, 만화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 및 기업과 연계해 그들의 창작물을 홍보 · 판매 · 서비스할 수 있는 마케팅 툴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 김범수의 또 다른 승부수, 다음-카카오 합병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던 카카오도 2014년 전후로 고비를 맞이한다. 야심차게 도전했던 글로벌 시장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둬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김 의장의 친정이자 경쟁사인 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라인(Line)’은 일본,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시장을 중심으로 무섭게 성장해나갔다. 또 한 번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찾아왔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던진 김 의장의 승부수는 놀라웠다. 국내 2위 인터넷 포털 서비스 ‘다음’과의 합병을 결정한 것이다.

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상은 99% 적중했다. 다만 전문가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1%가 있다. 바로 합병의 실질적 주체가 다음이 아닌 카카오였다는 점이다. 합병 법인 ‘다음카카오(현 카카오)’의 운영 주도권을 사실상 카카오가 잡게 되면서 자연스레 김범수 의장의 역할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됐다. 하지만 합병 이후 김범수 의장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다음카카오의 실질적 결정권을 쥐게 됐다는 사실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김범수 의장의 역할은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라는 직책뿐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러했듯, 굵직한 사업 결정 과정에는 김 의장이 직접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범수 의장이 가꾸고 키워온 카카오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온라인 · 모바일 서비스 분야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하며 국내외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물론 카카오의 오늘을 이끈 그의 리더십 역시 카카오만큼이나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의장은 ‘대학생이 뽑은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기업인’, ‘가장 혁신적인 기업인’ 명단에 항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EY한영이 개최한 ‘제9회 EY 최우수 기업가상(EY Entrepreneur Of The Year)’ 시상식에서 마스터 · 서비스부문(Master · Service Industry)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 의장은 △기업가 정신 △재무 성과 △전략적 방향 △국내 및 세계적 영향력 △혁신성 △개인적 품성 및 사회적 기여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카카오톡을 통해 기존에 없던 가치를 창출하고, 산업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쓴 김 의장의 성과가 반영된 결과다.

아이위랩에서 시작된 김범수 의장과 카카오의 여정도 어느덧 10년차를 맞이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을 수도 있기에 김 의장과 카카오의 미래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실 어떠한 변화가 찾아올지 예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난 10년간 보여준 김 의장과 카카오의 혁신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설사 카카오가 보여줄 수많은 혁신 중 몇몇이 실패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카카오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순간마다 빛날 ‘승부사’ 김범수 의장의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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