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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주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한국 3대 재벌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그만큼 일찌감치 야망이 컸다.
그런 최종건 회장도 주머니가 비어 쩔쩔매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부인인 노순애 여사는 결혼 예물로 받은 금반지를 최종건 회장의 손에 쥐어 주며 조용히 내조했다. 지난 28일 향년 89세로 별세한 노 여사는 최종건 회장이 1973년 49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묵묵히 옆을 지켰고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후에는 SK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노 여사는 두 살 연상인 최종건 회장과 1949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노 여사는 결혼생활 내내 이해심이 넓고 끈기가 강했다. 그룹 시발점이었던 선경직물을 창립한 1953년, 최종건 회장은 갓 창업한 회사를 챙기느라 한 달이나 공장에서 숙식했다. 20대 젊은 새댁이었던 노 여사는 남편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직원들의 식사까지 챙기고 나섰다.
노 여사가 없었으면 선경직물도 없었다. 선경직물 설립 3년여 전, 한국전쟁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다녀온 최종건 회장은 경기도 수원에서 시어머니와 집을 지킨 노 여사와 상봉했다. 서울의 창고에 인견사를 사뒀던 최종건 회장은 부인의 말에 따라 창고에 들렀고 폐허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인견사 11고리를 발견해 이를 선경직물 설립의 종잣돈으로 삼았다.
29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는 최신원 SKC 회장,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 등이 자리를 지키며 고인을 추억했다. 최종건 회장과 노 여사는 슬하에 3남4녀를 뒀다. 첫째인 고(故)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이 2000년 후두암으로 별세한 후 최신원·창원 형제와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는 노 여사였다. 최태원 회장의 부인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은 최태원 회장과 시간 차를 두고 빈소를 찾아 망자를 추억했다.
재계 관계자들의 조문도 잇따랐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이 이날 오전 빈소를 방문했다.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등도 빈소에서 최신원·창원 형제를 위로했다.
빈소를 찾은 한 SK 계열사 임원은 "그동안 SK그룹의 경영권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노 여사의 역할이 컸다"며 "최신원 회장 등이 허전한 마음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