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식사는 생존을 위해 반복해야하는 힘들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즐거운 일과가 됐다. 미래에는 여기에 창의성과 다양성, 편의성이 더해질 전망이다. 21세기형 도깨비 방망이로 불리는 3D프린터가 식품산업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 미국 TV 시리즈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에는 만능 복제장치 ‘리플리케이터(Replicator)’가 나온다. 이 기기는 모든 물질을 복제하는데 음식도 예외가 아니다. 스테이크에서 스낵, 따뜻한 커피까지 뭐든 만들어낸다.
이런 영화 같은 세상이 머지않아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 21세기의 도깨비 방망이라 불리는 3D프린터를 통해서다. 원료와 설계도만 있으면 뭐든지 3차원으로 인쇄해내는 3D프린터를 활용, 식용 가능한 식품을 인쇄하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는 것. 이미 시제품 단계의 제품이 다수 개발돼 있으며, 몇몇 업체는 2016년 상반기 상용제품 출시를 목표로 막바지 기술고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인쇄하는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3D프린터로 음식을 인쇄하려는 시도는 2010년대초 시작됐다. 원료 카트리지의 교체가 가능해진데다 2개 이상의 원료를 동시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되면서 3D 식품 프린터가 차세대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특히 미 항공우주국(NASA)과 미군이 이 분야의 원천기술연구에 돌입하면서 관련기업들의 투자에 불이 붙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스크린을 뚫고 나온 리플리케이터
실제로 NASA는 2013년 텍사스주의 한 기업에 12만5,000달러를 지원, 우주비행사를 위한 3D 식품 프린터 ‘다목적 식품 합성기’의 연구에 뛰어 들었다. 화성 등 유인 우주탐사와 미래 외계행성 거주지의 건설을 위해서는 식량조달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데, 3D 프린터가 가장 합리적 옵션의 하나라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는 현재 탄수화물과 단백질, 다량 영양소, 미량 영양소를 파우더 형태로 제작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며 피자의 인쇄를 첫 목표로 삼고 있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심우주 유인탐사를 위해서는 15년 이상의 유통기한을 가진 우주식품의 개발이 요구된다”며 “파우더에서 수분을 완벽히 제거할 경우 최장 30여년에 이르는 유통기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미군 역시 지난해부터 육군 산하 네이틱 군사연구개발 공학센터(NSRDEC)에서 군용 식품과 전투식량을 인쇄하는 3D프린터 개발에 나섰다. 미군은 이를 통해 보급로 차단 시의 원활한 대응과 식량 운송비절감, 각 병사의 취향별 식품 선택권 부여, 음식쓰레기 발생량 저하, 그리고 약 3년인 현 전투식량의 유통기한 연장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에 맞춰 기업들의 도전도 날로 거세지는 추세다. 레오 쿠키로 유명한 몬델리즈는 3D 쿠키 프린터를, 세계 최대 파스타 제조업체 바릴라는 레스토랑용 3D 파스타 프린터를 개발 중이다. 또 허쉬가 시제품 초콜릿3D 프린터 ‘코코제트(CoCoJet)’를 개발해 제과점을 대상으로 시범보급에 나설 예정이다.
독일기업 바이오준은 음식을 씹거나 삼키기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을 위한 3D 프린팅 식품을 2016년초 출시할 계획이다. ‘세네오프로(seneoPro)’로 명명된 인쇄 기술을 사용한 이 식품은 기존 음식과 외관과 맛이 유사하면서도 씹을 필요 없이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유동식이다. 이미 감자와 닭고기, 돼지고기, 완두콩, 꽃양배추, 파스타 형태의 식품이 개발돼 있다.
이외에 네슬레 등 많은 다국적 식품기업들이 3D프린팅 기술과 식품 산업의 접목에 연구 역량을 모으고 있는 상태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
3D 프린터 제조사들이라고 이러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그냥 놓아둘리 만무하다. 세계 양대 3D 프린터 제조사인 3D 시스템즈만 해도 ‘셰프제트’와 ‘셰프제트 프로’ 등 2종의 3D 식품 프린터를 개발했고, 소비자들의 활용성 증대를 위한 디지털 3D 프린팅 요리책까지 내놓았다.
스페인의 내추럴머신은 추가 조리과정이 필요하지만 파스타, 크래커, 햄버거 등의 음식을 인쇄하는 ‘푸디니(Foodini)’를 금명간 출시할 예정이며 영국의 도브테일드는 칼슘염(calcium salts)을 원료로 과일 모양의 젤라틴 디저트를 인쇄하는 ‘누푸드(N?food)’ 프린터의 시제품 개발을 완료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수년간 3D 식품 프린터 개발을 표방한 기업이 XYZ프린팅, 3D클라우드, 껌랩(Gumlab), 보쿠시니(Bocusini) 등 10여 개사나 출현했다. 현재 킥스타터 같은 소셜 펀딩사이트에서 투자자를 찾는 스타트업도 하나둘이 아니다.
이 기업들이 정조준하고 있는 타깃은 당연히 일반 가정이다. 우주비행사나 군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식사는 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3D 식품 프린터가 냉장고나 전자레인지처럼 주방의 필수가전으로 자리매김할 경우 산업적 파급력이 수조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와 관련 미국 농무부(USDA)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이 한끼의 식사 준비에 소비하는 시간은 평균 30분 정도다. 그런데 3D 식품프린터를 활용할 경우 연평균 3.8일의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것으로 예측됐다. 완성된 레시피를 다운받아 인쇄하는 만큼 조리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상생활의 편의성을 한단계 높여줄 또 하나의 문명의 이기가 탄생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개인 맞춤형 식품 시대
특히 전문가들은 3D 식품 프린터가 단순히 ‘특별식’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넘어 지구촌 기아(飢餓) 극복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저개발국에 3D 식품 프린터를 보급, 필수 영양소가 함유된 음식을 인쇄·공급한다면 최소 비용으로 많은 아사자를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3D 식품 프린터는 개인 맞춤형 식품 시대를 열어젖힐 수도 있다. 3D 프린터의 특성상 카트리지의 교체만으로 손쉽게 가족 개개인의 입맛과 기호, 건강 상태에 부합하는 영양소나 감미료, 향신료의 함량을 맞춤 인쇄할 수 있는 덕분이다. 한 식탁에서 아빠는 단백질, 엄마는 칼슘, 20대 딸은 비타민E, 10대 아들은 오메가3를 토핑한 피자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꿈이 아니다. 상용모델 개발을 거의 완료하고 출시일을 조율 중인 업체만 3D 시스템즈, 내추럴 머신, 도브테일드 등 최소 3개사에 이른다. 초기모델인 탓에 식품보다는 디저트의 인쇄에 가깝지만 기술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요리 수준의 식품을 인쇄하는 제품의 상용화도 멀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물론 아무리 3D 프린팅 기술이 발전하고, 그 효율성과 편의성이 크더라도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인쇄되는 날은 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 기계가 만들어낸 유사 청국장과 유사 제육볶음이 어머니와 아내의 손맛을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미래의 주방에는 가족을 위해 땀을 흘리며 요리하는 주부 옆에 3D 프린터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톡톡 튀는 3D 식품 프린터
현재 연구 개발되고 있는 3D 식품 프린터는 기본적으로 원료의 분말화 및 액상화가 가능한 먹거리를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캔디와 쿠키, 피자, 초콜릿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개중에는 꽤 독특한 음식(?)을 내놓는 녀석들도 있다.
추잉껌
옥스퍼드대학과 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재료과학을 전공한 마리아 넬슨,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출신의 가릉 린이 의기투합해 천연 또는 합성수지와 착향료를 원료로 추잉껌을 인쇄하는 3D 프린터 ‘껌제트(GumJet)’를 개발했다. 일반 껌과 동일한 직사각형을 포함, 사용자가 원하는 어떤 형상으로도 인쇄가 가능하며 색상과 맛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gumlab.uk
팬케이크
전기 그리들과 3D 프린팅 암(arm)을 결합한 ‘팬케이크봇’. 팬케이크 믹스 반죽이 인쇄되면서 그리들이 가열돼 팬케이크가 완성된다. 사용자는 설계도가 저장된 USB나 SD메모리를 팬케이크봇에 끼운 뒤 프린트를 실행하면 된다. 우주인에서 에펠탑, 공룡, 헬로키티에 이르는 모든 형상의 팬케이크를 인쇄할 수 있다. 개발자인 미구엘 발렌수엘라는 두 딸을 위해 집에 있던 그리들과 레고로 팬케이크봇을 제작했는데 주변 반응이 좋자 소셜 펀딩사이트에서 자금을 투자 받아 상용제품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pancakebot.com
아이스크림
스페인 요리기술 기업인 로봇 인 개스트로노미(RIG)가 자사의 3D 프린터 ‘푸드폼(FoodForm)’과 폴리사이언스의 쾌속냉동용 쿡탑 ‘안티-그리들(Anti-Griddle)’을 활용해 아이스크림 3D 프린터를 선보였다. 안티-그리들의 그리들 표면 온도가 -34℃에 달해 아이스크림 용액이 닿으면 곧바로 얼어붙는다. robotsingastronomy.com
다량 영양소 (macronutrient) -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 생체가 정상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다량 섭취가 요구되는 영양소. 이에 반해 철(Fe), 아연(Zn), 붕소(B), 망가니즈(Mn) 등 소량의 섭취로도 충분한 영양소를 미량 영양소(micronutrient)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