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무엇이 총수의 가슴을 조이게 하나

15년 새 제조업 영업이익 반토막

"사업구조 고도화 실패 땐 생존불가"

오너·CEO, 변화 필요성 강조 잇달아

원샷법 넘는 '기업생존법' 고민할 때


재계 4위 그룹 총수인 구본무 LG 회장. 직접 만나본 그의 모습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소탈하고 온화하다. 사람도 쉽사리 바꿔 쓰지 않는다. '인화(人和)의 LG'라는 세간의 평가에는 창업주부터 내려온 총수 일가의 따뜻함이 배어 있다.

그런 구 회장이 요즘 확 달라졌다. 연이어 직사포 쏘듯 '위기'를 강조하고 '새로움'을 애처로울 정도로 갈구한다. 신년사에서 "성장은 고사하고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고 호소하더니 지난달 말 40여명의 계열사 사장들과 이틀에 걸쳐 진행한 마라톤회의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사업구조를 고도화해야 한다"며 연신 절박함을 표했다. 무엇이 그의 가슴을 이렇게까지 조이는 것일까. LG의 상황을 비교적 잘 아는 한 재계 인사는 구 회장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 구 회장의 발언들은 의례적 수사(修辭)가 아닙니다. 전문경영인은 알기 힘든 산전수전 다 겪은 오너만 느낄 수 있는 '생존' 자체에 대한 위기감을 직감적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사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기업의 리더가 위기론을 과도하게 설파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때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직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독약이 된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오너와 최고경영자(CEO)들이 연이어 가장 높은 톤으로 위기를 얘기하는 것은 왜일까.

분명한 것은 단순히 중국 경기가 꺾이고 글로벌 시장의 앞날이 안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웬만한 CEO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 상황은 극복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경기 사이클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두 차례의 외환위기도 너끈히 넘어선 학습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기에 대한 상황인식은 과거보다 도리어 심하고 두려움마저 묻어나온다. 최근 사석에서 한 10대그룹 계열사 대표가 전한 말은 경영자들이 느끼는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정말 두려운 것은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알 만하면 금세 현실이 됩니다. 위협요인에 불과하던 중국 화웨이는 불과 1년 만에 들쥐처럼 시장을 침식했습니다. 노키아가 주저앉은 지 얼마 안 돼 애플이 구글에 역전당한 것 보세요. 눈 뜨고 코 베이기 십상이죠. "

화두로 떠오른 인공지능(AI) 세계만 해도 CEO들에게는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로봇과 자율주행차 등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미래 세계는 그들은 너무나 초조하게 만든다. 너무나 빠르게 다가오는 다른 세상에 대처할 방법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엄살이 아니다.

전문경영인들은 그래도 낫다. 그들은 임기만 마치면 되지만 오너들은 자신만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닌지 하며 좌불안석이다. 총수들이 경쟁하듯이 "지금과는 180도 다른 사업방식을 만들라"고 독촉하는 것도 세상의 변신 속도가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빠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4일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흐름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생존경쟁을 뚫기 위해 '퍼스트무버(선도자)'로 거듭나겠다. 제품 개발과 운영·조직문화 등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시장에서는 벌써 삼성이 진짜로 살아남으려면 소수의 신사업이 아니라 스마트폰조차 버릴 수 있는 용기, 삼성을 먹여 살릴 완전히 새로운 알파와 오메가가 있어야 한다는 조언이 흘러나온다. "삼성을 버려야 삼성이 산다"는 것이다.

삼성뿐 아니다. ㈜대한민국의 살 길 역시 ㈜대한민국을 버리는 데 있다. 우리 기업의 절대적 강점이었던 하드웨어 산업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지난 15년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은 반토막이 났다. 전통 제조업을 버릴 수는 없지만 소프트웨어와 플랫폼을 결합하는 융복합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업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고가 아니라 현실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을 뛰어넘는 절절한 고민이 필요하다. 기업 활력을 높이는 차원이 아닌 생명의 방정식을 새로 쓰는 '기업 생존법'이 필요할 때다.

김영기 산업부장 yo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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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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