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60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사농공상'

수조원 피해 무릅쓴 개성공단 폐쇄

수천억 면세점 공중분해 결정 등 상인·시장 수백년 지나도 '을' 노릇

경제성장 기업에 달렸단 점 기억해야


지난 11일 밤 개성공단에서는 입주기업 직원 200여명이 피난민처럼 쫓기듯 탈출 러시를 벌였다.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가동중단과 북한의 추방 조치로 124개 입주업체들이 하루아침에 생존의 터전을 잃은 것이다. 원부자재·설비·재고 등 피 같은 재산을 남겨두고 몸만 가까스로 빠져나온 한 섬유업체 대표는 "'어떠한 정세와 관계없이 개성공단을 유지한다'는 2013년 남북 합의는 차치하고 정부가 어떻게 당사자인 기업인들의 의중을 깡그리 무시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느냐"며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냐"고 울분을 토했다.

기업인들이 황망해하던 이날 서울시는 느닷없이 '경제민주화 정책'이라는 탈을 쓴 초법적 규제안을 내놓아 재계의 공분을 샀다. '골목상권과 합의 없는 대형마트는 불허한다'는 게 요지. 기업의 발목을 잡는 유통산업발전법을 뜯어고쳐도 모자랄 판에 되레 더 강력한 규제를 들고나온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유통업체는 물론 납품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 농어민의 규제혁파 외침은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는 공허한 메아리"라며 "(그들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도 정치논리에 매몰돼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없는 듯하다"고 한탄했다.

국가 경제의 중추이지만 '높은 분들'에게는 여전히 안중에도 없는 우리 기업들의 현주소를 보면 과거 왕조시대의 '사농공상(士農工商)'제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시점의 신분제인 사농공상은 선비인 양반을 으뜸으로 쳤고 둘째는 농사일을 하는 농부를, 그 다음은 장인을, 장사치는 가장 말단으로 치부했다. 상인은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돈을 가지고 이익을 얻는 사람이라며 멸시하고 상업을 천하게 여긴 것이다. 실제 중종·숙종 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벼슬아치·관료 등 정치를 하는 '사(士)'들이 물물거래 이윤을 추구하는 '상(商)'들을 억압하고 시장을 부정하고 규제하는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평행이론이라도 있는 걸까. 상인과 시장을 '을'로 치부하는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니 개성공단 기업들의 피해가 수조원대로 예상되는데도 일언반구없이 공단 가동을 단칼에 중단하고 대형마트 출점 및 영업 규제로 수십조원의 내수 효과가 허공에 사라지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고 규제 법령을 들이미는 것을 보면 현대판 상(商)의 처지가 오히려 왕조시대보다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롯데와 SK의 수천억원대의 면세점들을 한순간에 공중 분해해 논란을 낳고 있는 면세점 규제도 기업과 기업인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와 맥이 맞닿아 보인다. 글로벌 면세업계마저 비웃던 '5년 한시법'을 당사자를 배제한 채 관료와 정치인이 뚝딱 합작해 기업들이 수십년간 피땀 흘린 공든 탑을 허망하게 무너뜨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인의 몫이다. 지난 2일 하루아침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자리를 잃은 200여명의 롯데면세점 직원들은 국회 앞에서 대규모 규탄 결의대회를 열고 "정부의 졸속행정 밀실야합과 국회 법 개정 실수로 세계 1위 면세산업의 고사와 국가경쟁력이 급락할 처지에 놓였다"며 "잘못된 면세점 법안을 바로잡고 고용안정을 보장하라"고 통곡했다.

'우월한' 사(士)들의 잘못된 정책과 규제, 장사꾼을 백안시하는 태도로 인한 기업인들의 피눈물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인허가권을 틀어쥔 그들의 손짓 발짓에 이 땅의 '하찮은' 상(商)들은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고 피해를 입어도 울음을 삼켜야 했다. 더디기만 한 핀테크 규제 철폐, 넘쳐나는 중기 인증제, 과도한 친환경 규제, 철옹성인 수도권 규제, 청년실업 양산하는 통신 규제 등 상식적이지 못한 정책에서 기업은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0~1970년대 경제개발기에 '상공농사(商工農士)'를 주장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못 팔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한국에서 기적의 고도성장 주역은 기업가였다. 그들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대한민국이 위기를 맞은 이 순간, 기업가가 을인 패러다임을 바꿔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살 수 있다. 상공농사의 실사구시적 이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홍준석 생활산업부장 jsh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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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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