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시각] 응답하라 동네 빵집의 추억

정민정 성장기업부 차장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제빵 대표단이 ‘베이커리 월드컵’(Coupe du Monde de la Boulangerie)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 4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 베이커리 시장에선 변방이나 마찬가지인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 동안 ‘빵’ 하나만 바라보고 묵묵하게 걸어온 동네 빵집 장인들이 거둔 소중한 성과다.

우승 트로피를 안고 기뻐하는 이들을 보면서 문득 그들에게 삶의 터전인 동네 빵집의 어제와 오늘을 반추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동네 빵집은 지금의 스타벅스처럼 친구나 연인과 만남의 장소이자 특별한 날이면 아빠 손을 잡고 들렀던 스페셜한 곳이었다. 빵집 아저씨의 손길을 거쳐 나온 투박한 모양의 곰보빵이나 단팥빵은 어린 입맛에 ‘즐거운 외출’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크루아상·바게트 등 다양한 제품과 인기 연예인을 모델로 내세운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골목을 파고 들면서 동네 빵집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동네 빵집의 쇠락은 대한제과협회중앙회 회원 수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2000년에 전국 회원 수는 8,000명에 달했지만 2005년에 7,000명으로 줄더니 2014년에는 4,000명 수준까지 쪼그라들었다. 손님들을 프랜차이즈 점포에 빼앗긴 동네 빵집들은 물가 상승과 인건비 상승, 자본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반면 프랜차이즈 점포는 2000년부터 꾸준히 늘어 현재 5,000곳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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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동네 빵집 쇠락의 1차적인 책임은 빵집 주인에게 있다.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했던 탓이다. 국민 소득이 오르면서 급속히 바뀌는 식생활 문화에 보폭을 맞추지 못했고 빵의 재료나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주먹구구로 접근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 끝에 ‘전국구 빵’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아성을 구축한 동네 빵집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전 최고의 명물 성심당의 지난 60년은 동네 빵집의 미래상을 제시한다. 1956년 찐빵집으로 문을 열고, 2011년 세계적인 맛집 가이드 ‘미슐랭 가이드 그린’에 국내 빵집으로는 최초로 이름을 올렸으며 지금은 직원 280여명에 연 매출 270억원을 올리는 어엿한 중소기업이다. 버터케이크가 대세였던 시절 생크림케이크 판매를 최초로 시작했고 빙수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을 때는 녹지 않는 스티로폼 포장을 개발해 시장을 선점했다. 히트작으로는 하루 평균 1만개가 넘게 팔리는 튀김 소보로와 판타롱 부추빵이 꼽힌다.

기자는 프랜차이즈 점포보다 마케팅 능력이 부족하고 제품 개발력도 약하다는 이유로 동네 빵집을 보호해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 시장 경제에선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국구 빵집으로 부상한 성심당이나 이성당, 그리고 이번에 세계 제빵계를 평정한 기술 장인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빵만큼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술력을 갖췄고 덕분에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췄던 건 아니다. 고객과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간판이 낯설거나 제품 모양이 투박하다는 이유로, 실력 한 번 펼치지 못하고 링 밖으로 퇴출되는 일이 없도록, 최소한의 환경은 보장돼야 한다. 그런 시각에서 이달 말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만료를 앞두고 주목을 받고 있는 동네 빵집 문제를 들여다 봤으면 한다. 다행히 제과점업은 적합업종으로 재지정될 전망이다. 우리가 어렵게 실천하고 있는 공존의 가치가 빛을 발해 언젠가 60년, 아니 100년 역사의 명품 동네 빵집을 내 집 앞에서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jminj@sed.co.kr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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