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당보다 법...'배신'의 대법관



추악하고 더러웠다. 미국도 초기에는 선거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1800년 대선과 하원의원 선거가 특히 그랬다. 독립전쟁 이후 11년간 집권해온 연방파는 선거 패배가 가져올 파장에 떨었다. 조지 워싱턴이 사망해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 연방파는 주권파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줬다. 막바지에 이른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패배가 확실시되자 연방파는 꼼수를 부렸다.

존 애덤스 대통령과 연방파는 사법부에 눈을 돌렸다. 법원조직법을 뜯어고쳐 연방판사 수를 늘리고 임기만료 하루 전에는 밤새도록 임명장을 남발해댔다. 오죽하면 ‘한밤중의 법관들(midnight judges)’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까. 대법원장에 임명된 마셜의 경우 국무장관과 대법원장을 한달간 겸임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일종의 ‘정치적 알박기’로 연방법원에 포진한 법관들은 연방파의 기대대로 행정부와 사법부를 적지 않게 괴롭혔다. 별도의 건물도 없이 의회 한 모퉁이를 빌린 법원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가던 무렵, 소송 하나가 정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름하여 마버리 대 매디슨 소송(Marbury vs Madison). 한밤중에 임명된 법관 중 한 사람이었던 윌리엄 마버리와 새 정부 국무장관인 매디슨에 대한 소송이었는데, 마버리는 법적 절차 미비를 이유로 임용을 거부당하자 송사를 일으켰다.

판결의 키를 잡고 있던 인물은 역시 ‘한밤중의 법관’들과 비슷한 과정으로 임명된 마셜 대법원장. 마셜은 1803년 2월 24일 ‘법원조직법은 위헌’이라며 마버리에게 최종 패소판결을 내렸다. 자신이 속했던 연방당에 불리하게 판결한 것이다. 새 정권은 재판 결과를 승리로 받아들였지만 정작 승자는 따로 있었다. 승자는 법(法).


의사당에 세 들어 살던 대법원이 집주인 의회가 만든 법률을 헌법의 이름으로 찢어버린 이 판결은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법원조직법)이라도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단하면 무효라는 판례는 ‘사법부의 우위’라는 전통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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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6주간의 속성 법률교육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국무장관을 지낸 40대 중반의 정치인 출신이었던 마셜이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대법원장으로 재임하며 ‘최고의 대법원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법치의 원칙’을 확고하게 세운 덕분이다. 연방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마샬은 ‘배반의 정치’를 했는지는 몰라도 행정과 입법, 사법부가 상호 견제하는 미국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다.

사법부가 법률 전체를 심사할 수 있다는 사법심사(judicial review), 또는 위헌 판단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물론 사법심사 자체에 관한 사례는 마셜이 최초가 아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의 익명 기고집 모음인 ‘연방주의자 논고(The Federalist Papers)’의 끝 부분에도 대법원에 의한 위헌 심사권 행사 대목이 나온다.

경제사가 윌리엄 번스타인이 지은 ‘부의 탄생’에 따르면 법에 의한 법률과 통치 행위에 대한 심사의 존재 여부는 경제적 성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다. 마샬의 판결이나 17세기 초반 영국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가 내린 국왕 패소 판결은 사법 심사의 모범인 동시에 시장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얘기가 된다.

마샬 대법원장의 명판결 즈음의 프리즘으로 한국을 본다. 정치 행태가 닮았다. 의석수 감소가 두려워 안전장치로 만들어 놓은 국회선진화법이 마치 경제의 발목을 잡는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중성, 자신과 다르면 배신으로 몰아 부치는 행태가 추악하고 더러웠던 213년 전 미국 정치권과 도긴개긴이다.

닮기는커녕 근처에 못 간 것도 있어 보인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미국 연방 대법관들의 우정, 사망한 연방대법관의 후임자 선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의견 수렴 노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디케의 저울은 기울었고 존경할 만한 법관은 더더욱 찾기 어렵다. 극히 일부의 판사와 검사 빼고는 법이 권력과 돈, 세태에 일그러져 있다면 사회의 발전도 경제의 미래도 없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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