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7월 1일부터 1958년 12월 31일까지 1년 6개월에 걸쳐 전 세계 67개국의 과학자들이 참여한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행사가 진행됐다. IGY는 지구의 물리적 환경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 세계에서 모인 과학자들은 위성 등 고도의 측정 장비와 서로의 연구 결과물들을 공유함으로써 남극, 지구자기, 빙하 등 11개 분야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2년째였던 1958년은 1833년 창립한 스위스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가 125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25, 50, 75, 100 등 쿼터(Quarter)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스위스에서 125주년은 굉장히 뜻깊은 해로 인식됐다. 예거 르쿨트르의 숙련공이었던 줄스-세자르 사바리 Jules-C?sar Savary는 예거 르쿨트르의 125주년을 기념하자는 의미에서 재밌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한창 화제였던 IGY의 연구 활동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계를 제작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시계가 1958년 출시된 Geophysic Chronometer였다.
Geophysic Chronometer는 IGY 극지방 연구자들을 위한 기능성 시계로 제작됐다. 이 시계는 겉으로 보기엔 심플한 다이얼에 시, 분, 초침만 있는 평범한 드레스워치이다. 하지만 이 시계는 현재 나오고 있는 익스트림워치급 시계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스펙을 자랑한다. 연구원들이 실내에서 고상한 연구를 하든, 아니면 실외에서 영하의 추위와 싸우며 데이터 수집을 하든, IGY 극지방 연구원들이 활동하는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는 시계였던 셈이다.
이 시계는 소프트 아이언 이너 케이스 설계(케이스 안쪽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설계)를 통해 안티마그네틱 기능을 구현했다. 극지방의 강한 자기장에 시계가 오작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시계의 심장으로는 크로노미터급의 성능을 자랑하는 예거 르쿨트르 핸드 와인딩 칼리버 478BWSbr이 장착됐다. 478BWSbr은 고정밀 시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스완넥 마이크로 레귤레이터’와 온도 변화와 충격에 강한 ‘글루시듀르 밸런스’가 사용된 무브먼트다.
Geophysic Chronometer의 탁월한 성능이 IGY 연구원들의 경험을 통해 입증되면서 이 시계는 여러 극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58년 8월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USS 노틸러스호가 북극점을 횡단하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수행할 때에도 이 시계는 선장인 윌리엄 앤더슨 William R. Anderson의 팔목 위에서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2014년, 예거 르쿨트르는 Geophysic 1958을 출시하며 50여 년이나 잠들어 있던 Geophysic Chronometer의 명성을 다시 깨웠다. 한정판으로 출시된 Geophysic 1958은 Geophysic Chronometer를 거의 그대로 재현한 일종의 복각형 트리뷰트 에디션이었다.
예거 르쿨트르는 이 시계에 예거 르쿨트르 오토매틱 칼리버 898/1을 탑재했다. 478BWSbr과 898/1은 연관성이 거의 없는 무브먼트들이다. 이 둘은 기계식시계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인 스프링을 감는 방법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478BWSbr은 수동형이고 898/1은 자동형이다. Geophysic 1958의 외형을 Geophysic Chronometer와 거의 똑같이 만든 것치곤 의외의 선택이다.
이 같은 선택에는 Geophysic Chronometer가 가지고 있던 ‘기술적 도전’, ‘워치메이킹 기술력의 정수’ 등과 같은 이미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 예거 르쿨트르의 워치메이커들은 Geophysic 1958 역시 현재 예거 르쿨트르 매뉴팩처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력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무브먼트가 898/1이었다. 898/1은 현재까지 나온 예거 르쿨트르 무브먼트 중 가장 정확하고 신뢰도가 높은 무브먼트로 평가된다. 윤활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라믹 볼 베어링과 토크의 부드러운 변속을 가능케 하는 스피어 기어 등의 사용이 898/1 무브먼트의 특징이다.
그리고 2015년, 예거 르쿨트르는 홍콩 워치스 앤드 원더스 Watches & Wonders 행사에서 마침내 Geophysic 컬렉션을 론칭했다. Geophysic Chronometer의 명성과 Geophysic 1958의 인기에 힘입어 Geophysic 시리즈를 독립된 컬렉션으로 확장한 것이다.
예거 르쿨트르는 이 자리에서 Geophysic 컬렉션의 하위 모델로 Geophysic True Second와 Geophysic Universal Time 두 시계를 선보였다. 이 두 시계는 독특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초침이 트루 세컨드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과 두 시계의 무브먼트인 770, 772가 밸런스 휠로 자이로랩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보통의 기계식시계는 시곗바늘이 물이 흐르듯 매끄럽게 움직이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트루 세컨드 방식이 적용된 기계식시계는 초침이 점프하듯 움직여 대조를 이룬다. 이런 방식은 주로 쿼츠시계에서 선보이는 방식이지만, 기계식시계에도 이스케이프먼트 휠의 스프링에 힘을 축적했다 푸는 메커니즘을 적용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기계식시계 분야에서 트루 세컨드 방식의 구현은 난도가 상당해 트루 세컨드는 컴플리케이션 기능의 일종으로 평가받는다.
자이로랩은 예거 르쿨트르가 2007년 발표한 Master Compressor Extreme Lab 1 프로토타입 시계에서 처음 선보인 장치이다. 자이로랩은 공기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밸런스 휠의 축을 하나만 남기고 축 양옆의 휠도 상당 부분 많이 드러냈다. 이 때문에 자이로랩은 보통의 밸러스 휠과 달리 원형이 아니라 닻 모양을 하고 있다. 공기 마찰을 최소화한 덕분에 자이로랩이 사용된 시계들은 일반 밸런스 휠을 사용한 시계들보다 더 높은 신뢰도를 자랑한다.
Geophysic True Second와 Geophysic Universal Time 두 시계는 시각적인 아름다움도 공유한다. 각각에 쓰인 770, 772 무브먼트 모두 넉넉한 볼륨감과 인상적인 브릿지 비율로 눈길을 끈다. 무브먼트 각각의 파트에는 코트 드 제네바 패턴이 장식돼 있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이밖에 수퍼루미노바 처리된 핸즈와 미니 인덱스, 예거 르쿨트르의 엠블럼인 앵커를 디자인 모티프로 사용한 싱글 블록 골드 로터 등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상한 매력을 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