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필리버스터


1935년 6월. 휴이 피어스 롱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이 자신의 포퓰리즘 정책을 옹호하겠다며 연단에 올랐다. 오후12시30분부터 시작된 연설은 다음날 오전4시까지 이어졌다. 무려 15시간30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 쿠키 요리법을 읽어가며 시간을 때웠다. 100쪽이 넘는 의사록을 만드는 데 당시 돈으로 5,000달러나 들었을 정도다. 유력 대선후보인 버니 샌더스 민주당 상원의원도 연설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샌더스는 2010년 12월 물만 마시며 8시간37분에 걸쳐 연설했다. 고소득자 감세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침10시께 시작된 연설은 초저녁에야 간신히 끝났다고 한다.

의사진행 방해행위를 일컫는 필리버스터는 16세기의 해적선이나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래 서인도의 스페인 식민지와 함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1854년 미국 상원에서 네바다주 독립안건을 계기로 일부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정치용어로 자리 잡았다. 장시간 연설은 물론 의사진행 또는 신상발언 남발 등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는데 무엇보다 연설자의 체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번에는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겠다며 필리버스터를 들고 나왔다. 첫 주자로 나선 김광진 더민주 의원은 5시간33분의 토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본회의 최장기록을 경신했다. 은수미 더민주 의원의 연설시간은 김 의원의 두 배에 달하는 10시간18분이었다.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달성했던 10시간15분을 불과 3분 차이로 깨고 국내 최장 기록을 세운 것이다. 물론 다른 의원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이 기록도 조만간 깨질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필리버스터 법안은 미국의 것을 베꼈지만 미국에서조차 다수결 원칙을 훼손하고 헌법에 근거가 없다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높다. 자칫 국익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운다면 이해관계가 첨예한 법안들은 아예 처리가 불가능한 사태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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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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