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나폴레옹과 컴퓨터…허먼 홀러리스



나폴레옹과 IBM, 증기기관과 인구조사……. 난집합이 아니다. 컴퓨터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끼친 요소들이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과 사건, 사안들은 한 사람을 통해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독일계 미국인 허먼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남북전쟁 발발 1년 전인 1860년 2월 29일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컴퓨터 시대의 개척자이자 상업용도로 계산기를 팔아 성공한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광산학을 전공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의 진짜 관심 분야는 통계. 인구 조사로 고민하던 미국 통계청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미국 통계청의 최대 고민은 인구 조사. 집계하고 발표하는 데 갈수록 시간이 걸렸다. 독립 직후인 1790년부터 10년마다 전체 인구를 조사해온 미국은 9차 조사(Census)였던 1870년까지는 조사와 집계에 5년 걸렸으나 10차 조사(1880년)는 7년이 지나서야 작업을 마쳤다.

무엇보다 활발한 이민 유입으로 인구가 폭증했다. 1870년 3,855만명이던 미국 인구는 1880년 5,019만명 수준까지 늘어났다. 아예 인구조사를 없애자는 극단적인 의견이 제기되고 1890년 11차 조사는 12년 걸릴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막상 11차 조사가 끝난 뒤 전체 인구가 6,262만명이라는 통계가 발표되기까지는 2년 6개월이 걸렸을 뿐이다.


마술이라도 작용한 것일까. 미국 통계청의 특별 자문역으로 일하던 허먼 홀러리스가 개발한 천공계산기(Tabulator) 덕분이다. 가로 80단, 세로 12단이 그려진 두꺼운 종이(천공카드)에 구멍을 뚫어 영문과 숫자 기호 등의 정보를 저장하는 천공카드 판독기(계산기)는 집계 시간을 최대 10분의 1까지 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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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러리스는 어떻게 혁신을 이룰 수 있었을까. 거인의 어깨, 즉 앞선 사람들이 남겨준 유산에 힘입었다. 과학사가 제임스 버크의 ‘핀볼 효과(Pinball Effect)’에 따르면 홀러리스에서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자카르 직조기.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1798년)에서 돌아오면서 프랑스에 유입된 ‘이집트 비단 숄’이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자 J.M.자카르가 1805년 발명한 직조기에서 원리를 따왔다.

종이판의 구멍으로만 바늘이 통과해 숄을 짜는 자카르 직조기와 훌리리스 천공계산기는 비슷한 작동원리로 움직였다. 홀러리스의 계산기는 바늘이 천공카드의 구멍을 통과하면 수은이 담긴 조그만 컵에 잠겨 전기신호를 보내고 계수기의 숫자가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홀러리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산기에 증기기관을 달려고 시도했던 찰스 베비지의 해석기관에서도 배울 점을 찾았다.

인구조사 집계에서 증명된 천공계산기의 성능에 고무된 홀러리스는 1896년 회사를 차려 정부기관은 물론 기업과 금융회사에서 쏟아지는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임대료로 1,000달러씩 받았던 계산기 임대업이 본업이었으나 정작 수익은 무수히 많이 소요되는 소모품인 천공카드 판매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컴퓨터보다 잉크 판매업자가 더 정보화의 덕을 보는 요즘과 비슷하다.

홀러리스의 회사는 합병과 인수 과정을 거친 끝에 1924년 간판을 국제 사무기기 회사(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로 바꿔달았다. 오늘날까지 컴퓨터와 정보기기의 강자로 군림하는 IBM이 탄생한 것이다. 홀러리스의 천공 카드 판독시스템은 1970년대 후반까지 쓰이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어도 정보화 시대를 연 신호탄이었다. 천공기 등장 이후 정보통신의 발달은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다. 나비 날갯짓 하나로 태풍이 일고 핀볼처럼 종잡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유동하는 근대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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