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어리석은 다수 혹은 비겁한 다수에 의해 짓밟힌 내 진실이 무슨 모진 한(恨)처럼 나를 버텨나가게 해준 것이었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권력의 화신 엄석대에게 대항하던 작품 속 화자(話者) 한병태가 던진 독백이다.

29년 전에 읽었던 소설 내용이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 명예훼손 사건과 상당히 겹쳐 보인다. 특히 병태의 독백은 권력과 다수의 횡포에 저항하는 박 전 대표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지난 3일 그녀를 둘러싼 막말과 성추행 의혹은 모두 허위로 밝혀졌다. 이로써 박 전 대표는 자신의 표현처럼 '인격 살인 당하고 사회적으로 생매장당해 무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15개월 만에 당당히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

사건의 전모를 들어보면 박 전 대표에 대한 시향 직원들의 따돌림과 음해에 정명훈 전 서울시향 감독이 직접 개입한 정황이나 증거는 없다. 마치 병태가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 석대가 현장에 없었던 것처럼. 또 서울시는 진실을 밝히기보다 사건을 무마하기에 바빴다. 담임선생이 석대의 불합리한 처사를 모른 채 넘어간 것처럼.

다만 소설에서 병태는 석대에게 굴복하고 권력의 비호 아래 안락함을 누렸지만 현실 속 박 전 대표는 달랐다.

진실을 향한 외침은 반향 없는 메아리였고 마녀사냥식 여론 몰이에 두문불출하면서도 다수의 횡포에 맞섰다.

결국 경찰은 정 전 감독의 부인이 직원들의 투서에 개입한 혐의를 찾아냈고 시향 전·현직 직원 10명을 무더기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새 담임 선생의 추궁에도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던 급우들처럼 아직도 시향 직원들은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제 사건은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건의 중심에는 박 전 대표가 아니라 정 전 감독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서게 됐다.

시향 직원과 단원들은 정 전 감독을 '마에스트로'라고 부른다. 전문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거장(巨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음악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렇듯 예우를 받는 거장이자 한국인이라면 의혹에 숨지 말고 진실 앞으로 당당히 나와야 한다. 부인과 주변 인물의 잘못이 밝혀지면 거장답게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일이다. 검찰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에 현혹되지 말고 가감 없이 수사해야 한다.
김성수 사회부 차장 ss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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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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