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명품의 자격

금성 선풍기·탱크주의 냉장고 등 수십년 지나도 끄떡없는 내구성

디자인만큼 본질가치 충실해야

어릴 때 우리 집이 장만한 최초의 가전제품은 금성사 선풍기다. 1970년께부터 가족의 여름을 책임졌던 것 같다. 30년이 넘도록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전기만 꽂으면 바람을 내뿜는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언젠가 작동 시간과 방향을 제어하는 2개의 회전식 버튼이 망가졌을 때는 부품이 없어 펜치로 돌리는 응용동작으로 해결했다. 켜고 끄는 누르기 버튼이 눌리기를 멈춘 어느 날 선풍기를 고물상에 넘길 때는 오래 사귄 정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코가 시큰했다. 당시 "부품만 있으면 30년을 더 써도 끄떡없겠다"며 아쉬워한 기억이 난다.

요즘 비싼 외제 지갑이나 핸드백 등에 붙어 다니는 명품이라는 표현은 잘못됐다. 그런 것은 품질보다 상표 가치에 따라 값이 정해져 비쌀수록 잘 팔리는 사치품이라고 해야 맞다. 명품이란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던 금성사 선풍기처럼 본질가치로 소비자에게 감동을 주는 제품이다.

결혼 뒤 몇 년 지나서 산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냉장고도 명품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쓰다가 고장이 났을 때는 쓸 만큼 썼다고 생각했다. 새 냉장고를 사기 위한 요식행위로 수리기사를 불렀는데 아저씨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소모품인 냉각팬이 고장 났네요. 냉각팬만 교체하면 앞으로 10년은 더 가겠습니다." 냉각팬만 고쳐서 사용하던 냉장고를 지난달 바꾼 것은 냉각 성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손잡이가 삭아서 문을 여닫기가 어려운 게 컸고 한편으로는 그냥 워낙 오래 써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새 냉장고는 겉모습만 멋있다. 품질은 당연히 옛날보다 좋으려니 하며 넘겨짚은 게 실수였다. 살 때는 몰랐는데 집에 설치한 뒤 보니 식품 용기나 그릇을 내려놓는 유리판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래로 휘었다. 바닥의 과일·채소 칸은 천장 구실을 하는 유리판이 주저앉아 빼고 넣기가 힘들었다. 유리판은 높이 조절이 되지 않는 고정형이어서 큰 김치통을 넣을 수 없었다. 유리판 하나를 떼어내 한 개 층을 줄였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크기는 전의 것과 비슷한데 용량이 작아졌다는 점이다. 탱크주의 냉장고는 문을 열면 깊이가 상당했다. 새 냉장고는 거의 한 손 이상 모자랐다. 부품이 20년 전에 비해 더 커지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집에 온 수리기사는 "이제껏 그런 민원은 없었는데요. 달리 방법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다가 갔다.


눈뜬 장님인 우리 부부 말고 이렇게 저급한 냉장고를 살 소비자는 없을 것이다. 혹시 요즘 대세인 양문형 냉장고는 어떨까. 단문형은 서민용이니까 대충 만들고 양문형은 이문이 많이 남으니까 정성을 들인다면 정말 큰 일이다.

둘러보면 냉장고만이 아니다. 지구인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스마트폰은 사용기간이 기껏 2년이다. 2년이 지나면 액정이 손의 터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소비자는 신제품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저 기존 제품을 오래 쓰고 싶어한다. 그런 소비자가 스마트폰에서 원하는 것은 업그레이드된 성능이 아니라 내구성이다.

수출은 늘어도 모자랄 판에 14개월째 감소하고 소비는 회복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절벽 앞에 선 지 오래됐다. 경제가 살려면 기업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 국내외에 많이 파는 수밖에 없다. 싸구려의 대명사인 중국제도 품질을 내세우는 요즘 명품을 만들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흔히 한다. 디자인이 명품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라면 명품의 절반을 만드는 시작은 품질이요 내구성이다.

우리 집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앰프와 스피커가 있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음악을 틀면 감동의 소리가 퍼진다. 명품이다. 대학교 후배는 훨씬 비싼 디지털 오디오를 갖고 있는데도 고풍스러운 우리 집 제품을 부러워한다. 냉장고·세탁기·TV·스마트폰 등 전기제품도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보다 가치가 빛을 발하는, 그래서 자식에게 물려줄 만큼 멋진 명품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 국산 명품을 보고 싶다.

/한기석 논설위원 hank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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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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