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6일 현대증권 인수를 추진했던 일본계 사모펀드(PEF) 오릭스 프라이빗에쿼티(PE)는 돌연 현대증권 인수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금융당국의 대주주 적격 심사가 세 차례 연기될 때도 “큰 문제가 없다”던 이종철 오릭스 PE 대표는 “국내 정치권에서 파킹 딜이나 일본 야쿠자 자금 관련설 등 루머가 확산되며 일본 본사가 부담을 느껴 인수전에서 발을 뺄 것을 권했다”며 아쉬워했다.
시장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현대증권 매각을 통해 2013년 말 세웠던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계획을 마무리 지으려던 현대그룹과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산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오릭스PE의 결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꽤심한 행동”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국내 사모펀드(PEF)업계의 반응도 차가웠다. 2002년 옛 대한생명을 시작으로 국내에서 10여 년간 2조3,000억 원의 투자를 집행한 오릭스PE의 과거 실적을 감안하면 현대증권 포기가 “아예 한국 영업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 이 기간 중에 오릭스가 국내에서 투자한 대한생명, 와이케이스틸, 셀트리온, STX메탈 등 투자기업들의 내부 수익률은 25~65%에 달한다.
오릭스 PE는 이 같은 비판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빠른 시일내에 결과물을 확보할 수 있는 딜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으로 투자 방향을 틀며 보고펀드의 LG실트론 지분(29.4%) 인수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고펀드는 2007년 지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빌린 금융권 대출(2,250억원)을 갚지 못해 채권단에 지분 처분권한이 넘어갔다.
오릭스PE는 2014년 말 채권단으로부터 보고펀드 지분의 우선협상자로 선정됐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채권단은 오릭스 PE로의 지분 매각에 동의했지만 1대 주주(51%)인 LG그룹이 오릭스PE가 요구했던 △2018년 기업공개(IPO) △오릭스 측 사외이사 1명 파견 △태그얼롱(Tag-along·동반매도권)조항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릭스PE는 현대증권 인수 무산 후 LG실트론 협상에 매달려 LG그룹으로부터 IPO와 사외이사 파견과 관련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를 근거로 일본 본사로부터 투자 승인을 받기 위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오릭스 본사의 동아시아사업본부 소속 한국실장으로 회사의 높은 신임을 얻고 있는 이 대표의 투자 요구에 본사는 지난 2일 태그얼롱 조항 삽입을 전제로 투자 승인을 결정했다. 이 대표는 “본사의 투자승인으로 지분 인수 협상이 속도를 낼 것”이라며 “LG그룹과 태그얼롱 조항 삽입을 포함해 주주 간 계약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이 태그얼롱 조항에 반대할 경우 딜이 무산될 수도 있지만 오릭스PE는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아 나갈 방침이다. IB업계의 관계자는 “3년 내 IPO도 LG그룹이 애당초 강하게 거부했던 사안이었지만 양측이 협상을 통해 이견을 좁힌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협상이 잘 진행되면 태크얼롱 조항 문제도 잘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