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지옥-천국 오간 화가… '뉴욕의 오치균'을 보다

■ 4월 10일까지 개인전

유학생활 힘겨움 표현 'Figure'

환상적 색감의 센트럴파크까지… 뉴욕 1~3기 대표작 100여점 선봬

금호미술관 설치전경 3층 (2)
뉴욕 유학시절의 힘겨움을 자화상으로 표현한 오치균의 'Figure'시리즈가 금호미술관 벽면을 채우고 있다. /사진제공=금호미술관
Houston Street, 1995, Acrylic on Canvas,169x111cm
'휴스턴 스트리트' /사진제공=금호미술관
West Broadway, 2015, Acrylic on canvas, 130x194cm
'웨스트 브로드웨이' /사진제공=금호미술관

그릴 것이라고는 벌거벗은 자신의 몸뚱이 뿐이었다. 창문도 없는 작은 방. 빛이라고는 TV브라운관의 깜빡임이 전부였다. 잠시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고, 온몸을 뒤트는 그림 속 사내는 소리 없이 절규한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던 20대의 오치균(60)은 절박한 삶의 돌파구를 찾아 어둠을 두드렸다.

1986년을 전후한 오치균의 '피규어(Figure)' 연작이 금호미술관의 전시장 한쪽 벽을 가득 채웠다. 탐스러운 주홍빛의 '감' 시리즈 혹은 평화로운 풍경의 '산타페' 시리즈로 유명한 오치균의 '풍요로운' 이미지를 주로 접했던 관객이라면 충격적일지 모른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오치균은 8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고 생존 자체가 외로운 싸움이던 시절을 보냈다. 이른바 '뉴욕 1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또 다른 대표작인 '홈리스(Homeless)' 시리즈는 시커먼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봐야만 거리에 몸을 뉘인 부랑자를 찾아낼 수 있다. 터널 끝 작고 희미한 불빛을 응시하게 만드는 '지하철' 시리즈도 이 시기 작가의 어두운 심리를 대변하는데, 이 그림은 훗날 인기작가로 화려한 명성을 쌓을 그의 미래를 예견한다.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을 두텁게 쌓아 올려 손가락으로 '지두화(指頭畵)'를 그리는 오치균은 투박할 법한 손가락 움직임인데도 흉내 내기 어려운 섬세함과 탁월한 서정성의 표현으로 독보적이다.

뉴욕에서의 유학시절이 지옥 같았다면 2007년을 즈음한 미술시장의 호황은 그에게 천국을 경험하게 했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998년작 '사북의 겨울'이 6억원을 넘기며 낙찰됐고, 경매건 전시건 나오는 작품은 모조리 팔려 나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이 소장했던 '전재국 컬렉션'이 2013년 경매에 나왔을 때도 오치균의 작품이 10여 점이나 포함됐고 모두 새 주인을 찾아갔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2005~2014년 낙찰 총액에서 7위를 차지해 생존작가로는 이우환, 김종학을 잇는 '최고 몸값'이다. 10년간 낙찰률은 전체 3위(70.06%)였다.

유학에서 돌아와 1991년 귀국전을 가졌던 금호미술관에서 25년 만에 다시 작품을 선보인 오치균은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그림에 표현되고 내 자신의 모습도 캔버스에 보이는 것 같다"며 "30여 년간의 변화를 작품을 보면서 내 스스로도 느낀다"고 말했다. 90년대 다시 떠난 '뉴욕 2기'는 세상에 작품을 확인시킨 안도감과 경제적 안정의 덕분인지 눈 쌓인 뉴욕 거리 풍경이나 내려다 본 '엠파이어 스테이트' 등에서 대담함과 여유가 풍긴다. 이어 2014년에 작업한 '뉴욕 3기'는 오치균 특유의 풍요로움이 만개한 색감으로 센트럴 파크를 펼쳐 보인다. 가히 환상적인 색감이다. 짓눌렸던 젊은 시절에는 자본주의와 도시문명 밖에 볼 줄 모르던 눈이 지천명(知天命)을 넘기고야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게 했다.

100여점 대작들 가운데 손바닥 남짓한 그림 하나가 자꾸 눈에 밟힌다. 80년대 후반, 이렇게 그림만 그려서 어떻게 자식과 먹고사나 걱정 어린 눈으로 작가를 돌아보는 아내의 초상화다. 그럼에도 살아냈다. 4월10일까지. (02)72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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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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