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망국의 회한이 서린 손탁호텔



피아 구분 없이 모이고 친미·친러파 대신들이 친일파로 변해간 공간이 있다. 고종과 독립협회의 우국지사는 물론 이토 히로부미와 재정고문 재임 3년간 대한제국의 재정을 거덜 낸 메가타 다네타로도 이 곳에서 편히 쉬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이름이 많다.

손택부인가(孫澤夫人家), 손택저(孫澤邸), 손택양저(孫澤孃邸), 손탁빈관(孫澤賓館), 한성빈관, 손택낭저(孫澤娘邸), 손택양가(孫澤孃家), 손택양씨가(孫澤孃氏家), 손택양사저(孫澤孃私邸), 손택양저(孫澤孃邸), 손택양관저(孫澤孃館邸), 손택양여관(孫澤孃旅館), 궁내부 용달여관(宮內部 用達旅館), 정동화부인가(貞洞花夫人家), 정동화부인옥(貞洞花夫人屋), 정동화옥(貞洞華屋)…. *


무수히 많은 이름들은 한 건물을 지칭한다. 손탁호텔. 프랑스계 독일 여성 앙트와네트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 운영한 호텔이다.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으로 알사스 지방이 독일에 병합되며 독일인으로 국적인 바뀐 손탁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주한 러시아 공사 위베르를 따라 1885년 한성에 들어왔다는 정도가 전부다.

조선 땅에 처음 발들일 당시 미혼이었는지 미망인이었는지, 이혼녀인지도 불확실하고 한자의 가차(假借)로 표시되는 조선 이름도 많았다. 손택(孫澤 또는 孫宅), 송다기(宋多奇), 송탁(宋卓)…. 확실한 점은 당시 나이. 31세였다. 한자로 표시되는 이름과 영업점의 상호가 많았다는 점은 조선사회가 그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지만 통용되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미스 손탁(Miss Sontag).’

위베르의 처형인지, 사촌 처형인지도 불분명했으나 그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에 능통하고 조선말도 익혀 조선에서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손탁의 손을 거친 서양식 요리에 맛들린 고종은 그를 각별하게 여겨 궁내부 관원 자리도 내줬다. 명성황후도 서양 소식을 들려주고 화장술까지 알려주는 손탁을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자연스레 조선에서 손탁의 입지는 점점 변해갔다. 음식을 만드는 찬모(饌母)에서 왕실의 참모(參謀)로.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의 방 5개짜리 한옥까지 내려줬다. 내부를 서양식으로 고친 손탁의 집은 곧 한성 외교가의 사교장으로 바뀌었다. 명성왕후를 잃고 불안해하던 고종이 거처를 러시아대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에도 손탁이 간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휴가차 약 2년 유럽에 다녀온 손탁은 왕실로부터 더욱 큰 환대를 받았다.

환궁한 고종은 손탁에게 1898년 3월 16일자로 ‘노고에 보답하는 뜻(以表其勞事)’이 담긴 ‘양관하사증서’를 내리고 1902년에는 서양식 벽돌건물도 지어줬다. 근대식 호텔인 손탁빈관은 사무실이 없던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애용했다.** 일본을 견제하려는 친미파와 친러파들의 모임인 정동구락부(貞洞클럽)도 주로 손탁빈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일본을 배격하려던 이완용 등 젊은 관료들은 얼마 안 지나 친일파로 변해 일본 편에 섰다. 우국지사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손탁호텔도 친일파들의 소굴로 바뀌어 갔다. ‘미스 손탁’도 마침내 조선 땅을 뜨기로 마음 먹었다. 1909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이게 팔고 조선을 떠났다. 귀국할 때 나이가 55세. 24년을 머물며 손탁은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왕실의 서양 물품 구입에 모두 관여하고 왕실 소유 재산을 하사받아 매각하는 방식으로 돈을 불렸다. 손탁은 ‘부정하게 돈 벌었다’라는 질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지만 ‘망해가는 조선을 위한 벽안의 동지’는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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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의 단골 중에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재정을 말아먹은 탁지부 고문 메가티는 손탁호텔에서 황실의 돈으로 마음껏 마시고 먹었다. 이토가 투숙하며 조선 대신들을 불러내 회유, 협박한 장소도 손탁호텔이다. 깨끗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의 일기에는 손탁이 의료 계산서를 위조해 1,000원씩 단위로 궁정 돈을 타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관찰사(도지사격) 월급이 40원, 군수가 28원이던 시절, 1,000원이면 대단히 큰 금액인데 손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손탁의 행적은 조선 땅을 떠나서도 불분명하다. 프랑스 칸느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건만 조선에서 모은 돈을 예금했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통에 빈털터리로 전락해 객사했다는 설 이외에 알려진 게 없다.****

세월이 흘러 손탁도 손탁호텔(이화 100주년 기념관 자리가 손탁호텔 터)도 흔적조차 없으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성향은 비슷해 보인다. 친미와 친러, 친일로 변신하며 살아남아 떵떵거리는 자들과 일개 찬모에 휘둘렸던 국왕,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과연 무엇이 다를까. 한국어를 구사하는 서양인이면 연예인급의 조명을 받는 세태…. 종족의 부끄러운 단면이 참으로 끈질지게 이어진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지음, 손탁호텔 143쪽

** 손탁호텔을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소개하는 책자도 있으나 실은 개항장인 제물포(인천)에는 1884년부터 4~5개의 소규모 서양식호텔이 선보였다. 한성에서도 서울호텔과 팔레호텔 등이 있었다. ‘최초’라는 점보다는 정치인들이 모이고 권력의 변화에 따라 손님의 주류도 같이 변해간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손탁호텔은 의미가 있다.

*** 손탁이 조선을 도왔다는 인식은 결정적으로 1976년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뮤지컬로도 제작된 희극 ‘손탁호텔’의 영향이 커 보인다. 극에서는 서재필을 남성으로서 흠모한 손탁이 독립신문 3,000부 돌파 연회를 손탁호텔에서 개최한다는 설정이 나오지만 설정일 뿐이다. 한성에서 지내던 24년간 손탁의 염문은 발견되지 않는다. 유별나게도 손탁호텔과 관련해서는 검증되지 않는 자료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는 평가는 약과에 불과하다.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이 신문기자 시절 묵었으며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도 투숙객이라는 기록이 신문매체를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지만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 다만 객사설은 친러시아파가 분명했던 손탁에 대한 반감이 컸던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는 있다. 손탁이 양자로 삼아 한성을 떠날 때 데리고 갔던 조선인 청년은 훗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손탁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 양반가문에도 ‘딸을 내어주면 양녀로 삼겠다’는 제의를 했는데 그 가문은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사느니 차라리 서양인의 양녀로 들여보낼까’라고 고민했던 기록이 있다. 손탁의 양반가문 여식 양녀 입양은 성사되지는 않았다.

권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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