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고무줄 잔혹사



고무줄이 없는 세상. 상상이 잘 안된다. 생활과 너무도 밀접하기에…. 고무줄이 없었다면 아이들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기저귀에서 고무줄 놀이, 새총, 머리 끈에 이르기까지 고무줄에 의존했었으니까. 어른들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간단하게 모으는 데서 치과 치료까지 고무줄의 쓰임새는 넓고도 넓다.

간단하면서도 생활 편의를 주는 고무줄을 사용한 세월은 길게 잡아야 200여년 안짝. 서구에 고무가 전해진 시간을 헤아려도 523년에 불과하다. 유럽의 관점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2차 항해(1493년)에서 이스파뇰라섬(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의 원주민들이 갖고 노는 고무공을 본 게 서구문명과 고무와의 첫 만남이었다.


탄력이 뛰어난 물질 정도로만 인식되던 고무가 생활의 도구로서 들어온 시기는 18세기 중반 무렵. 영국에서다. 영국인들은 고무를 문지르면 연필로 쓴 문서를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챘다. 고무의 영어 이름 ‘rubber’가 여기서 나왔다. ‘문지르다’의 뜻의 ‘rub’에 기능격 접사(er)을 붙인 것. ‘rubber’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산소의 존재를 발견한 과학자이자 신학자, 유물론적 철학자, 자유주의 정치학자로 유명한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 ~1804)라는 설이 유력하다.

지우개로서 기능을 확인한 고무는 용도를 넓혀나갔다.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는 1783년 비단에 고무를 입혀서 만든 기구를 하늘에 띄웠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본받아 고무 덧신과 고무병도 선보였다. 오늘의 주제인 고무줄이 바로 고무병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고무산업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는 토머스 핸콕이 1823년의 어느 날 고무병을 얇은 폭으로 잘라 여러 용도로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게 시초다.

핸콕은 증기기관차 제작자이며 고무절단기의 발명가인 동생 월터와 함께 형제 발명가로 이름이 높았어도 정작 독점권은 챙기지 못했다. 특허권을 가져간 인물은 스티븐 페리(Stephen Perry). 핸콕의 공장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는 페리는 1845년 3월 17일, 영국 특허를 따냈다. 페리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고무줄은 생활 곳곳으로 파고 들었다. 연필 지우개와 쿠션의 기능을 넘어 의복과 포장, 사무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고무의 수요증대는 생각하지도 못한 효과도 낳았다. 국제 정치와 노동력 이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마침 미국인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1839년 발견한 가황처리법이 퍼지던 상황. 천연고무에 유황을 섞어 가열해 탄력과 딱딱함을 갖춘 고무가 등장하며 각종 기계류의 충격 흡수재는 물론 자전거와 자동차용 수요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요는 공급을 부르는 법. 고무가 돈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영국인들은 브라질에서만 자라던 고무나무 종자를 대량으로 밀반출해 온실에서 묘목을 키운 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지에 거대 농장을 차렸다. 선진국 자본이 열대지역에 투자되는 플랜테이션 농업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퍼졌다. 현지인 인력이 딸리자 영국은 중국인들을 꼬셨다. 중국 남부의 노동자들의 대거 이주로 거대한 동남아 화교집단이 형성된 게 바로 이 시기다.

관련기사



동남아로 이주한 화교들은 초기에 극심한 고생을 겪었으나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 아프리카에서는 고무나무 잔혹사가 펼쳐졌다. 겉으로는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국제 아프리카 문명탐험대’를 후원하는 인도주의자로 행세했지만 속으로는 아프리카 중부에 거대한 사적(私的) 식민지를 구축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잔혹하게 고무를 짜냈다.

벨기에 본토의 80배가 넘는 아프리카 콩고 일대를 손에 넣은 그의 대리인들은 상아와 고무·야자유 채취 할당량에 미달하는 원주민의 손발을 생으로 잘랐다. 아담 호크쉴드 교수(UC버클리대)는 저서 ‘레오폴드왕의 유령’을 통해 벨기에가 이 지역에서 학살 당한 원주민을 1,000만명으로 추산한다. 철저하게 수탈 당한 콩고의 역사는 과거형일까.

형태만 달라졌을 뿐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콩고와 르완다 일대는 20세기 초까지 지역간 종족간 갈등이 없던 지역이었으나 벨기에가 식민통치를 위해 부족간 분열책을 쓴 결과 종족간 증오심이 싹트고 걸핏하면 인종 청소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상대 부족의 손목을 자르는 야만적 행위도 벨기에 식민수탈이 남긴 유습이다.

고무를 얼마나 짜냈는지 이 지역의 고무 나무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씨가 말랐다. 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에도 고무나무 이식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오늘날에는 전세계 고무나무의 90% 이상이 타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자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서쪽으로 계속 진군한 데에도 보르네이의 석유와 말레이시아의 고무를 차지하겠다는 자원에 대한 열망도 깔려 있었다. 군 장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 고무는 어느덧 필수재로 자리 잡았던 까닭이다.

수요는 발명을 촉진한다고 일본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점령은 미국을 자극해 합성고무의 탄생을 앞당겼다. 2차 대전 동안 미국이 전략물자용으로 개발한 합성고무는 오늘날 전세계 고무 수요의 약 75%를 차지하지만 넘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고무줄만큼은 여전히 천연고무에서만 나온다. 탄성이 커야 하기 때문이다. 고무줄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어도 거대 소비자는 따로 있다. 세계 최대의 고무줄 소비자는 미국 우체국과 포장업체들이다. 고무줄의 용도가 더 늘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고무줄처럼….

아프리카에서도 고무 생산이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기술 새치기와 씨앗 훔치기, 노동력 빼앗기로 점철된 고무줄과 고무의 역사가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무를 서구에 알려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무나무를 ‘카우축(caoutchouc)’라고 불렀다고 한다. ‘눈물 흘리는 나무’라는 뜻이다. 고무에는 눈물이 담겨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권홍우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