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벼랑끝 한국경제… 싱크탱크가 없다] 한국 싱크탱크의 역사

박정희, 사재 100만원 출연 KDI 설립 지시

고급두뇌 유치 위해 아파트·승용차 제공도

대우경제硏, 84년 민간 싱크탱크 첫 테이프


현재 우리나라 싱크탱크는 역할이 크게 위축됐지만 과거에는 국가경제 플랜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으며 인재의 산실이었다.

지난 1971년에 설립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우리나라 싱크탱크 역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부터 진행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며 경제발전 계획을 종합적이고 촘촘하게 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박 대통령은 사재 100만원을 출연해 KDI의 설립을 지시했고 서울 동대문구 홍릉에 있는 본관 건물 공사에 두 번이나 현장시찰을 갈 만큼 애정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KDI 개원 때 쓴 '번영을 향한 경제설계'라는 휘호는 KDI가 세종시로 이전한 지금도 로비에 걸려 있다. 지금이야 KDI의 연구원 대우, 평판이 예전만 못하지만 설립 초창기에는 고급 두뇌를 유치하기 위해 아파트·승용차를 제공하고 파격적인 연봉도 지급했다.

KDI 출신은 정관계 요직에 활발히 등용되기도 했다. 김만제 초대 원장은 전두환 정권에서 재무부 장관을 거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고 후에 포스코 회장도 지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거쳐 1987년 재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현재도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KDI 출신이며 현오석 전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는 KDI 원장을 지냈다.

민간 싱크탱크는 1984년 대우경제연구소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원화가치)에 힘입어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싱크탱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6년 4월 LG경제연구원이 '럭키경제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으며 7월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삼성생명 부설연구기관 형태로 탄생했다. 10월 현대경제연구원(당시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문을 열어 지금의 '민간경제연구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90~2000년대 민간경제연구소의 영향력은 급격히 커졌다. 민간의 참신한 시각에서 경제 및 산업 현상을 풀이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보고서를 하나 내면 인구에 활발히 회자될 만큼 영향력이 컸었다"고 회상했다. 실제 2005년 삼성경제연구소 홈페이지 회원 수는 개설 10년 만에 1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다만 대우경제연구소는 모기업이 흔들리며 1999년에 문을 닫았다.

민간경제연구소에서는 유력 인사도 많이 배출했다.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은 대우경제연구소 사장을 지냈으며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우연 선임연구위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희수 새누리당 기재위원장,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도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이다. /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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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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