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남북 함께 안중근 의사 생가 복원해야"

오늘 순국 106주기

수풀만 무성 황해도 집터 사진

기념사업회, 일반에 첫 공개

서울·창원·中 다롄서 추모제

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년을 앞두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공개한 북한 황해남도 청계동 안 의사 생가터다. 사업회는 2012년 11월 남북공동의 안 의사 의거 기념행사를 위해 방북했을 때 이 사진을 촬영했었다. /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안중근 의사 순국 106주년을 앞두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공개한 북한 황해남도 청계동 안 의사 생가터다. 사업회는 2012년 11월 남북공동의 안 의사 의거 기념행사를 위해 방북했을 때 이 사진을 촬영했었다. /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순국 106주년을 맞은 안중근 의사의 북한 황해도 생가터가 풀만 무성하게 우거진 채 방치돼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안 의사 순국 106주년을 하루 앞둔 25일 황해남도 신천군 청계동의 안 의사 생가터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에는 생가가 풀이 무성한 가운데 허물어진 벽돌담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사업회에 따르면 지난 2012년 11월 13∼17일 남북공동 하얼빈 의거 103주년 기념행사차 방북했을 때 찍은 사진으로 일반에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7살 때인 1885년 아버지 등 일가를 따라 이 곳 청계동으로 이사해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계동 일대에는 약 70가구가 살았고 안 의사 생가는 한국전쟁 때 폭격 등으로 허물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인근 저수지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개발이 제한되고 주변에는 주택이 3∼4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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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 일원이었던 윤원일 사업회 부원장은 “청계동 일대 수해가 나서 땅이 좋지 않았는데도 북측이 이례적으로 안 의사 생가터를 둘러보게 해줬다”며 “‘안중근렬사집터자리’라는 표지석도 확인했는데 수해 때문인지 시멘트가 마르지 않았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사업회는 북한 쪽 대화상대인 조선종교인연합회·가톨릭협의회와 안 의사 생가를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이 ‘김정은 체제’로 전환된 지 약 1년 무렵이었다. 생가가 복원되면 개성공단이 있는 개성과 멀지 않으니 남한 청소년들이 견학 오고, 안 의사 유적지 순례 등 관광 사업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며 생가 복원 사업이 흐지부지됐고, 최근에는 개성공단 동결 등으로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운 분위기다.

윤 부원장은 “안 의사는 남북이 이념을 떠나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가”라며 “대치상태인 남북이 안 의사 생가 복원으로 가까워지는 것이야말로 안 의사가 생전에 강조한 ‘동양평화’ 사상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안 의사 추모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리고 안 의사가 순국한 중국 다롄(大連) 뤼순 감옥에서도 추모제가 개최된다.추모식에는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과 안중근 의사 유족, 안중근 의사 숭모회원 등 4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 경남 창원 해군사관학교는 교정에서 안중근 의사 유묵비 제막식을 열어 안 의사를 추모할 계획이다.

안 의사는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힘쓰다가 일제의 강점이 본격화하자 의병운동에 투신,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 투옥돼 일제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중에도 의연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권홍우기자 hongw@sed.co.kr

오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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