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에 ‘희망고문’이라는 것이 있다. 대체로 ‘상대방에게 분명하지 않은 애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상대방이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주로 짝사랑하는 연인 간에 많이 쓰는 용어다. 가수 겸 제작자인 박진영씨가 1999년 자신의 수필집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희망고문’이 감정적인 내용을 포함한다면 ‘희망난민’은 훨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꿈을 이루기 힘든 시대에 꿈을 강요당하는 젊음’을 표시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후루이치가 이 용어를 사용한 책 ‘희망난민’(원제 希望難民ご一行樣 : ピ-スボ-トと「承認の共同體」幻想·희망난민들:피스보트와 ‘승인공동체’의 환상)이 이번에 번역돼 나왔다. 책은 2010년에 처음 출간됐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곧바로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저자는 일본의 젊은이가 처한 상황이 ‘희망난민’에 다름 아니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이미 꿈을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됐지만 기득권층은 마치 그것(꿈의 실현)이 가능한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고 또 강요한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일본도 한때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였다. 1960년대는 그랬다.
당시 일본인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성장에 취해 더 원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젊은이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혁명을 도모하기도, 그냥 안정적인 대기업에 입사해 편안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어쨌든 그때는 모든 게 가능했고 어떠한 목표든 이룰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사회변혁이나 고뇌는 사치가 됐고 취직과 결혼, 평범한 삶조차 가닿을 수 없는 꿈이 됐다. 경제성장이 멈춘 자리에서 모두가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사회는 여전히 ‘노력하라, 꿈을 가져라, 하면 된다’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상 선택할 수 있는 건 냉엄한 투쟁과 불투명한 미래뿐이다.
“‘좋은 학교’를 나와도 ‘좋은 회사’의 정사원이 될 수 있는 건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가족은 커녕 자기 자신을 부양하는 일조차 어려워진다. 가계가 어려워지면 교육의 기회도 줄어든다. 일본은 삼각형 구조에서 나가떨어지는 층과 점점 작아지는 파이를 두고 아귀다툼하며 어떻게든 삼각형 구조 안에서 버티려는 층으로 양극화하기 시작했다.”(32~33쪽)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평화헌법’과 ‘세계평화’ 등의 수호를 목적으로 일본내 비정부기구(NGO) 운영하는 세계 일주 크루즈선 ‘피스보트(Peace Boat)’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배를 타고 꿈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희망난민’이란 용어가 나왔다. 사람들은 여행에서 뭔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사회적 인정(승인)을 받고 또한 피스보트가 내세우는 대의명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항해를 떠난다. 114일의 여행기간 동안 승객들은 승인공동체를 이루지만 결국 그것뿐이다. 여행이 끝나고 배에서 내리는 순간 일상으로 돌아가 사회에 순응하는 그저 그런 존재가 된다. 저자는 세계 일주에 직접 참여한 것을 포함, 2년여간 크루즈 승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일본 내에서 진행되는 사회운동이라는 자극도 결국은 기존체제에 안주하는 인간을 만드는 데 그친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물론 이들은 일본에서의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한국어판 서문을 붙인 저자의 분석이다.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는 환경과 일터를 만들어나가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늦었다. 한국도 이런 전철을 따라갈 것인가. 한국마저 ‘희망난민 수용소’가 돼서는 안될 것이다. 1만7,000원. , 사진제공=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