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세계사 속 오늘] 천안문 광장 피로 물들다

1976년 4월 5일, 제1차 천안문사태

1976년 4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제1차 천안문사태). 사진은 천안문광장 전경. /출처=이미지투데이1976년 4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제1차 천안문사태). 사진은 천안문광장 전경. /출처=이미지투데이


중국 베이징 시내 정 중앙에 위치한 천안문 광장. 남북으로 880m, 동서로 500m, 총 면적 44만 ㎡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시 광장이다. 중국은 지난해 9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아 사상 최대규모의 군사퍼레이드(열병식)을 천안문 광장에서 열기도 했다.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며 첨단 무기로 군사력을 과시해 G2의 강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천안문광장도 피바다로 얼룩진 비극적 과거가 있다.


1976년 4월 4일 혁명 영웅을 기리는 청명절을 맞아 천안문에는 20만 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그들은 그 해 1월 사망한 저우언라이 전 총리를 추모하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야오원위안, 장칭, 장춘차오, 왕훙원)을 규탄하고자 했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는 항일전쟁 발발 후 공산당 대표로서 국공관계 처리를 맡았다. 그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거쳐 죽는 순간까지 국내외 중대사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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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일 새벽, 성토 대상이던 ‘4인방’은 광장에 있던 시민 약 50명을 체포했다. 저우언라이 전총리를 애도하며 ‘4인방’을 비난하던 일반 사람들이었다. 이에 분노한 수만 명의 청년이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일부는 건물과 인근 자동차를 방화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당국은 이를 빌미로 이날 무장한 민병 1만 명과 공안 경찰 3,000명, 인민해방군 부대가 출동했다. 광장에 포위된 군중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날 사상자 수는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았으나 베이징에서 체포된 사람만 388명에 이른다.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천안문사태’다. 이로 인해 당시 중국 공산당 부주석이자 부총리이던 덩샤오핑이 실각하고 화궈펑이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됐다.

13년 뒤 1989년 제2차 천안문 사태가 벌어진다. 1989년 4월 당시 급진개혁주의로자로 학생들로 부터 추앙을 받아오던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의 대학 및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덩샤오핑은 이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개혁파 당총서기인 자오쯔양을 축출하고 강경파 장쩌민 총서기, 리펑이 국무원 총리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리펑은 곧 베이징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천안문광장에서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김진희인턴기자 jh6945@sedaily.com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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