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응답하라 1986…춤추는 원유가격



‘저유가…장래가 불안하다.’ 요즘 얘기가 아니다. 30년 전 국내 신문 경제면 기사에 달린 제목이다. 당시 전문가들은 기름 값이 낮은 게 축복이냐 재앙이냐를 놓고 연일 논쟁이 벌였다. 어떤 상황인데 그랬을까. 1985년 말까지 배럴당 30달러 이상을 호가했던 국제 원유가격이 4개월 사이에 10달러 선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요원자재 가격이 짧은 기간에 이만한 폭으로 내린 것은 본격적으로 광물자원을 사용하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래 처음이었다.

유가를 끌어내린 것은 크게 세 가지 요인. 무엇보다 공급이 넘쳤다. 영국과 노르웨이의 북해유전이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소련도 제 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을 위해 기름을 한껏 뽑아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카르텔 역시 흔들거렸다. 전쟁을 치르던 이란과 이라크가 무기구매 대금 확보를 위해 배정량(쿼터)을 어기고 몰래 원유를 팔기 시작하며 다른 산유국들을 자극했다.


두 번째 요인은 OPEC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군기’ 잡기. 북해산 브렌트유 공급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감산에 나섰으나 다른 산유국들이 따라오지 않자 다시 증산에 나섰다. 증산은 증산 경쟁을 부르고 결국 가격 하락 압력이 커졌다. 쌓아둔 오일 달러가 많았던 사우디는 비협조적인 어떤 산유국과도 ‘치킨 게임’(무한 가격 경쟁)을 펼치겠다고 마음먹었다.

세 번째 요인은 사우디의 이란 견제 정책에서 비롯됐다. 이란의 회교원리주의 혁명 확산을 두려워했던 사우디는 연초에 이란이 전략요충지인 파우 반도를 점령하자 더욱 조바심냈다. 이란은 연간 석유판매대금을 195억 달러로 잡고 여기서 42억 달러를 해외무기 도입에 쓸 요량이었으나 이는 OPEC의 공시유가였던 배럴당 28달러를 전제로 삼은 것이었다. 이라크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던 사우디는 이란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감산 당시 250만 배럴로 줄였던 하루 생산량을 500만 배럴로 두 배 늘렸다.

이래저래 공급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 OPEC 전체의 하루 산유량이 1,750만 배럴이던 시절에 공급 과잉 물량이 300만 배럴에 이르렀다. 반면 수요는 줄어든 상태였다. 1973년과 1979년 1·2차 석유 위기를 겪었던 소비국들은 소형차 보급 확대를 비롯한 에너지 절약시책을 펼치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 산유국 전체의 원유 수출량이 1983년 물량에 묶인 채 늘지 않았다. 당연히 가격이 내려갈 수 밖에.

소비국들은 저유가를 반겼으나 미국에서는 논란이 빚어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시장에 맡기자’며 전반적으로 느긋한 편이었으나 유전밀집 지역인 텍사스와 루이지애나가 들끓었다. 에너지 산업이 침체에 빠지며 전국적인 실업률도 뛰었다. 급기야 미국 에너지부 장관 존 해링턴은 “유가 하락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경고하고 나섰다. 이전과는 성격은 다르지만 ‘제 3차 석유 위기에 들어섰다’라는 말도 나돌았다.

에너지부 장관보다 더 저유가를 근심하던 정치인도 있었다. 오늘 얘기의 주인공 격인 조지 부시 부통령. 부시는 동부의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을 펼쳐 자력으로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뒤 정계에 투신한 인물. 유가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던 부시 부통령은 “낙하산 없이 점프하려는 공수부대원 같은 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8박 9일 일정의 중동 순방길에 올랐다.


부시의 성명에 백악관 대변인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논평을 내놓았다. “가격을 안정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유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 특히 행정부에서 유가 안정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공감대가 이만큼 없었다. 유가 ‘안정’이 필요하다는 부시의 의지에 호의적인 언론도 많지 않았다.

관련기사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도 확실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시는 첫 도착지인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원군을 만났다. 24년간을 세계최대 산유국의 석유장관으로 재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는 사우디 내에서는 상대적 온건파였다. 유가 안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문제는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파드 국왕. 방문기간 내내 부시의 속을 태웠다.

파드 국왕의 행궁(行宮)인 동부 지역의 다란까지 찾아갔지만 부시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이란의 사우디 유조선 공격의 여파로 회담 연기를 통고 받기도 하고, 더운 낮에는 잠자고 그나마 시원한 밤에 일하는 사막 유목민족의 생활시간대 때문에 애먹었다. 접견 통고를 기다리다 지쳐 잠을 들 무렵에서야 전갈을 받은 시각이 자정 무렵.

1986년 4월 7일 새벽 두 시까지 이어진 2시간 30분간의 심야회동에서 두 사람은 두 가지 문제를 다뤘다. 국제 유가와 지역 안보. 페르시아만의 안전보장과 미국의 무기 수출이 주로 논의되고 유가 안정은 두 번째로 밀렸다. 사우디의 파드 국왕은 즉답도 안줬다. 부시가 국왕으로부터 어떤 확언을 받았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명한 점은 이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부시는 감산과 가격 인상을 주저한다면 수입 석유에 관세를 부과하겠는 협박 카드까지 곁들여가며 사우디의 강경파를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부시의 중동 방문 순간에도 현물 시장에서 유가는 7달러에 거래되기도 했지만 가격 안정에 대한 공감대는 널리 퍼졌다. 4개월 뒤 OPEC 총회는 유가를 배럴당 18 달러로 정하고 국가별로 감산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후 유가는 80년대 말까지 15~23달러라는 박스권 안에서 움직였다. 유가 안정 속에서 미국의 소비 심리가 살아나고 주식시장도 1987년 블랙먼데이(10월19일)까지 상승 가도를 내달렸다.

한국도 덕 봤다. 비교적 낮고 안정적인 국제유가와 저금리, 저환율(달러 약세 엔화 강세)이라는 3저 호황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해방 이래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에서 벗어나 1986년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유사 이래 처음인 ‘구조적 무역수지 흑자’는 오래 가지 못했으나 한국경제가 시장 여건에 따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국제 원유시장 안정의 최대 수혜자는 당사자인 조지 부시 부통령. 임기 후반부의 중반을 넘긴 레이건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목돼 1988년 대선에서 석유재벌들의 지원 속에 미국의 41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따르는 법. 피해 본 사람도 있었다. 1·2차 석유 위기를 경험한 50대 이상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야마니 석유장관은 OPEC의 가격 인하를 이끌어낸 직후 잘렸다. 파드 국왕으로서는 양보하되 강경론을 밀었던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야마니 해임이라는 카드를 선택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미국과 달리 피해가 극심했던 나라도 있다. 고유가를 고집했던 소련의 경제는 저유가로 인해 달러 수입이 격감하며 안에서 무너졌다. 서방이 안정적 박스권이라고 여겼던 유가가 몇 년 만에 소련 연방 해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역사는 정녕 반복되는 것인가. 오늘날의 유가 흐름이 30년 전의 데자뷔라는 분석이 꼬리를 문다. ‘그레이트 사이클’이라는 전문가도 있다. 과연 국제 유가는 어떻게 형성될까. 실로 궁금하다. 만약 30년 전처럼 국제 유가가 장기 안정적으로 형성된다면 우리 경제는 다시금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