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권홍우칼럼]노인과 함께 사라지다

50대 이후가 정책·선거 좌우

권한 커진 만큼 책임도 필요

노년층부터 각성·도전 안하면

경제 성과 바람처럼 사라질 수도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노인의 시대다. 선거의 계절, 후보자들은 경로당부터 유세를 시작한다. 당락이 노년층의 투표에 달렸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선거 결과는 투표율이 높고 성향까지 비슷한 연령층이 쥐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노년층의 결정력은 더욱 높아질 게 틀림없다. 인구 비중이 높아지는 데 따른 귀결이다.


노년 투표층의 증가는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세상을 사는 경험이 많은 노인의 지혜가 집단 선택에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무오류성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다. 노년의 선택이 항상 옳은가. 그렇지않은 경우라도 실은 큰 문제가 없다. 수정하면 되니까. 시간과 비용이 더 들더라도 반성을 거친 선택은 미래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이 바로 이것이다. 수정 능력.

우리 사회에 이런 기능이 있을까. 만약 특정 연령층의 집단 지성이나 선택이 한번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선 뒤 수정을 모르거나 거부한 채 반복된다면 그 사회는 갈등 속에서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다. 고약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수명 연장은 과연 축복일까. 경제가 계속 나빠지는 상황에서라면 생명 연장은 말라 죽는 고통의 기간 연장에 다름 아니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이 연작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에게 영생을 약속받았으나 젊음을 유지해달라는 소원은 잊었던 까닭에 점점 쪼그라들어 작은 단지 안에 기거하는 무녀의 소원은 ‘고통의 끝’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성의 순환이 없기에 만물이 소생하는 4월마저 ‘가장 잔인하다’는 생각은 바다 건너 살았던 옛 시인의 넋두리일 뿐일까.


김동환의 단편 소설 ‘북청 물장수’가 떠오른다. 한때 교과서에서 실렸던 이 작품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세대의 이야기를 새벽의 물소리처럼 신선하게 들려준다. 어쩌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이 이만한 성과를 이룬 것도 ‘북청 물지게꾼’ 같은 억척스러움과 자식을 공부시키려 일에 매진했던 부모 세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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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50~60대는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세대에 물려주고 있는가. 안 그런 것 같다. 당장 국민연금부터 고치지 않으면 자식 세대부터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세대의 안위를 위해 미래 세대의 부담을 애써 외면하는 세대는 해방 이후 처음이다.

요즘 어떤 경고 하나가 귀에서 맴돈다. ‘한국의 20~30대는 한국전쟁 이후에 처음으로 부모들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우려다. 장 교수의 우려에 불과할까. 장 교수의 우려가 우려에 그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50대 이상 기성세대와 노년층의 반성과 양보, 새로운 도전 없이 우리 사회가 갈등을 치유하고 전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떻게 양보하고 도전할 것인가. 어느덧 중년을 지나는 입장에서 예전부터 그려왔던 모델이 하나 있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을 떠올려 보자.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이 작품의 메시지는 간단하고 강렬하다. 노인의 도전!

헤밍웨이는 첫 문장을 이렇게 풀었다. “그는 걸프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늙고 가난하며 지친 노인은 바다로 나아간다. 사투 끝에 대어를 잡기 전후해 그는 꿈속에서 사자와 세 번 만난다. 용기와 힘을 상징하는 사자처럼 그는 끝내 이겼다. 정작 거대한 물고기의 살은 노인의 몫이 아니었다. 항구로 돌아왔을 때 뼈만 남았어도 그는 편안하게 잠자리로 들어갔다. 내일을 꿈꾸며.

도전은 틀 속에서 깨어나야 가능하다. 같은 값이면 양보 받을 게 아니라 양보해야 경제가 살고 나라의 운이 트인다.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거야”라고 말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과연 내일의 태양이 오늘처럼 빛날까. 스칼렛 오하라의 낙천성과 반성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반성 없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우리가 두렵다. 한국의 미래가 노인과 함께 사라질까 봐. 기성세대와 노년층이 변해야 할 때다. 공부하고 각성하며 땀 흘려야만 나라의 미래가 있다./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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