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마음코칭] 백세인생

가을 잎이 져야 봄에 꽃 피듯

자연의 순리 거스를 수 없어

죽음 두려운 만큼 소중한 삶

후회 없도록 열심히 살아야

정운 스님. 동국대 선학과 외래교수정운 스님. 동국대 선학과 외래교수




지난해 연말 연초, 간혹 TV에서 ‘백세인생’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칠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하도 자주 흘러나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사를 읽어보았다. 내용을 보니 인간의 애잔함이 묻어나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그의 시집 ‘기탄잘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생애가 끝나 죽음이 내 문턱을 두드릴 때,

나는 그 손님 앞에 나의 생명을 가득 채웠던 그릇을 내려놓겠습니다.

결코 빈손으로 그를 떠나보내지 않을 겁니다.”

타고르처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인생을 백세까지 살겠다고 발버둥 친다고 될 일인가. 인간의 삶이 어찌 내 맘대로 될 것이며 나이 순서대로 이생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그때’라는 것이 예고치 않으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리라. 하기야 어느 철학자는 인간이 종교를 믿는 것은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고픈 것이라고 했으니 함부로 죽음을 말하기에 민망하기도 하다.

중국 명나라의 4대 승려 가운데 한 분인 운서주굉(1532~1612) 스님이 있다. 스님은 생전에 아름다운 수필을 남긴 분으로 유명하다. 스님의 수필 가운데 내용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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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인이 죽은 후 염라대왕을 만나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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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 데려올 거면 진작 좀 미리 알려주어야 하지 않소!”

“내가 자주 알려 주었노라. 너의 눈이 점점 침침해진 것이 첫 소식이었고 귀가 점점 어두워진 것이 두 번째 소식이었으며 이가 하나씩 빠진 것이 세 번째 소식이었노라. 그리고 너의 몸이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계기로 몇 번이나 소식을 전해주었노라.”

이 이야기가 노인을 위한 것이라면 젊은이를 위한 것도 있다.

한 소년이 죽어 염라대왕에게 따졌다.

“저는 눈·귀가 밝고 이도 튼튼하며 육신이 건강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저에게 소식을 미리 전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대에게도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그대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로다. 동쪽 마을에 40세 된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 서쪽 마을에 20~30세 된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 또한 10세 미만 아이와 2~3세 젖먹이가 죽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어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고 불평하는가?”

육신의 병고나 늙음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한다.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존재에게 공평한 셈이다. 어쨌든 인생 일장춘몽이요, 생사(生死)가 한순간이다. 무엇을 그리도 애착하는가. 그렇다고 인생을 함부로 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우리에게 삶은 소중한 것이요, 절실하다. 그 절실한 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 하루, 보람된 한 달, 행복한 한 해가 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셈이다. 이렇게 삶을 산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음이요, 굳이 염라대왕에게 따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 그러니 백세까지 살겠다고 너무 애달퍼하지 말자. 김소월님의 시 구절처럼 아무리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아도 가는 봄은 잡지 못하는 법이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꽃이 만개하다. 떠나보내야 할 것은 떠나보내야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다. 봄에 꽃잎이 떨어져야 나무는 여름에 무성한 잎을 발산할 것이요, 또 가을에 잎들은 낙엽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해 봄을 기약한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수용하는 자세 또한 멋진 인생이라고 본다. 죽음이라는 손님에게 용감히 맞서자. 그래, 우리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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