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제1의 첼리스트를 꼽자면 파블로 카잘스다. 스페인, 아니 카탈루냐의 긍지를 갖고 산 참된 애국자이자, 독재에 억압받던 동족을 진정 사랑했던 예술가이며,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민중과 함께했던 휴머니스트. 그런 파블로 카잘스의 생애를 필자는 대학 시절 그의 전기를 통해 먼저 알게 됐고, 그의 연주를 통해 감동했으며, 그가 음악 활동을 했던 바르셀로나에 8년을 살며 비로소 그 위대함을 느끼게 됐다.
그의 카탈루냐식 이름은 ‘파우 카잘스 이 데피요’다. 1876년에 태어나 1973년 사망했으니 100세 가까이 장수하며 조국 카탈루냐의 격동을 함께한 셈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의 고통 속에 프랑코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카잘스는 독재에 저항하고 자유를 외치는 인본주의자의 삶을 시작한다. 프랑코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추방돼 카탈루냐와 프랑스의 국경 마을 프라드에 살았고, 말년에는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로 옮겼지만 1973년까지 생존해있던 프랑코로 인해 결국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프랑코의 독재 시절, 스페인은 물론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모든 국가의 초청을 거부했으며 독일 나치에 협력한 음악가들과도 교류를 끊고 세계의 진정한 평화를 염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소설가 토마스 만이 말한 ‘예술과 도덕의 영원한 결합’을 상징하는 불멸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가 바로 카잘스가 아닌가 생각된다.
카잘스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업적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세상에 알린 일이다. 열세 살 무렵 바르셀로나 항구 인근 좁은 골목길의 한 중고 서점에서 당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카피를 발견한 그는 그 곡을 홀로 12년간 연습해 스물다섯의 나이로 처음 무대에 올린다. 이 사건은 연주가로서의 그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스페인 왕실의 훈장을 받는가 하면 유럽 전역과 미국, 남미 등을 방문해 이름을 떨치게 된다. 알프레드 코르토와 자크 티보라는 전설적 명연주자들과 함께 트리오를 결성, 지금까지도 최고로 평가받는 명반들을 작업해 남긴 것도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카잘스는 조국을 떠나 처음 머물렀던 도시 프라드에 음악과 자유, 평화를 상징하는 페스티벌을 만들어 그의 음악적 역량을 펼쳤는데, 바흐 서거 200주년이었던 1950년 첫해부터 그가 90세가 되던 1966년까지 매년 참석하며 당시 그의 음악적 동료였던 세계적 연주자들이 이곳을 찾게 했다. 프라드 페스티벌은 현재 세계 5대 음악 축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971년 그는 UN 본부에서 평화상을 시상하는데, 당시 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자선 콘서트를 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의 끝없는 열정과 노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테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