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투표소 가는 길

1억 뛴 집값 얘기 가득한 곳에

유령처럼 자리한 판자촌

선거조차 비켜간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송영규 논설위원송영규 논설위원




선거일 아침. 투표소 가기 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내온 유인물 봉투를 다시 열어봤다. 낯익은 얼굴들과 그렇지 않은 모습, 쏟아지는 후보들과 정당들의 공약집…. 별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아내는 볼 것 없다며 빨리 가자고 한다. 하기야 누구를 찍을지 뻔하다. 후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 흔한 유세 차량을 만난 적 없지만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다. 2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단 한 번도 특정 정당 외에 다른 정당이 발붙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곳. 한때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조차 참패의 수모를 당해야 했던 지역, 이번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를 커다란 이변으로 평가해야 하는 선거구. 이곳은 서울 강남이다.


이 지역 최고의 관심은 단연 재건축이다. 1단지부터 7단지까지 노후한 아파트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당연하다. 한 달 새 1억원이나 뛰었다는 둥, 이 때문에 이전에 맺었던 계약이 줄줄이 깨졌다는 둥 여기저기서 온통 집값 얘기뿐이다. 여기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3명의 후보 모두 재건축·재개발을 공약으로 내건 이유이기도 하다. 각 당이 정책 공약을 다 쏟아내도 집값과 교육을 빼면 여기서 힘을 쓰는 것은 거의 없다.

집에서 투표장까지 가다 보니 거치는 곳이 있다. 요즘 보기 힘든 판자촌이다. 자고 나면 가격이 오른다는 재건축 아파트와 직선거리로 불과 2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88 서울올림픽이 결정됐던 1981년 전두환 정부가 외국인들에게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서울 시내 넝마주이 등을 집단 수용하면서 형성된 곳. 과거 포이동이었던 동네명이 개포동으로 바뀐 가장 큰 이유가 이곳이었다. 주민들이 이 판자촌 때문에 지역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며 강남 냄새 물씬 풍기는 옆 동네 이름으로 변경해달라고 요구했던 탓이란다.


한때 이 판자촌 아이들은 부근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일부 학부형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같은 학교에 판자촌 아이들이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득달같이 달려온 탓이다. 아이들은 다른 학교로 쫓겨나듯 옮겨야 했다. 덕분에 그 학교는 아직도 강남에서 잘 나가는 초등학교 중 한 곳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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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은 사방이 철판 구조물로 막혀 있다. 조그만 쪽문이 열리지 않는 한 그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외부인들은 알 수가 없다.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아이들이 상처받는 게 두려워 스스로 쳐 둔 마음의 벽이다. 어느 날 대학생들이 방문해 담을 화사한 그림으로 채색했을 때도 주민들이 잠시 호기심을 보였을 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의 무관심이 더 깊어졌다는 사실 뿐.

공약집을 뒤져봤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이곳 얘기는 없다. 이들이 내건 지역개발 공약은 역세권 개발과 재건축 요건 완화이고 이들이 약속한 교육 애로 해소는 사교육 1번지 대치동 못지않은 사교육 벨트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쪽방에 연탄불 몇 개로 겨울을 나는 주거환경은 딴 나라 얘기이고 받아주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30분을 걸어야 하는 아이들은 모르는 얘기다. 판자촌 주민들은 강남 구민도 유권자도 아닌 유령이다.

투표를 마치고 봄비를 머금은 벚꽃을 즐길 수 있는 양재천 북쪽 산책로로 향한다. 내리는 빗줄기에도 아랑곳없이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빠른 걸음을 하는 아주머니, 자전거 페달을 바삐 밟는 젊은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감상하며 길을 걷는 아가씨…. 일단의 무리가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띈다. 무의미한 눈으로 건너편을 바라보며.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면 20m 떨어진 개천 건너편 남쪽 산책로에 닿는다. 그곳에는 시커먼 고철덩이 속에 모습을 감춘 판자촌이 있다. 모두에게 잊힌 그래서 그들만의 세상이 있는 곳. 그들에게 선거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비에 젖은 출입문은 여전히 잠겨 있다.

/skong@sedaily.com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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