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미국판 권력형 비리, 티포트돔 스캔들



1922년 4월 14일,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이 1면 머리기사로 티포트 돔(Teapot Dom) 스캔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직전,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겠다고 결정한 미 해군은 석유가 부족해질 경우에 대비해 어렵사리 석유저장소를 마련했으나 사달이 났다. 뇌물과 부정부패가 잇따르고 폭로 기사까지 나오자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뇌물을 제공한 사업자와 받아먹은 고위공직자 등 당사자들은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심지어 ‘빨갱이들이 미국을 전복하려는 음모’라는 날조와 역작용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계파와 상관없이 이 사건을 집요하게 끝까지 파헤쳤다. 당시 대통령이던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이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악의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도 티포트 돔 스캔들을 비롯한 각종 추문 때문이다.


지형 생김새가 차 주전자 뚜껑처럼 생겼다고 티포트 돔이라는 이름이 생긴 해군 저장소가 스캔들의 진원지로 떠오른 시발점은 도둑질. 미 해군이 예비 연료 기지로 확보한 유전 근처에 유정을 뚫어 국가 재산(석유)을 훔쳐가는 사례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91년 쿠웨이트가 국경 인근의 유전에 구멍을 파서 자신들의 원유를 훔쳐갔다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유와 맥락이 같다. 민간인들의 기름 빼가기로 골머리를 앓던 당시 미 해군이 고른 대안은 매입. 주변 땅을 사들였다.

석유업자들은 규모가 커진 해군의 유류 저장소에 군침을 흘렸다. 석유저장 시설이자 원유 추가 매장 가능성이 높은 티포트 돔 지역을 차지하기 원했으나 해군이라는 벽에 막혔다. 유류저장소를 매입하거나 임대하려면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해군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군축회담이 시작된 1921년 이래 미 해군은 비상 저장시설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켜왔다.

해결 방법은 백악관에서부터 나왔다. 하딩 대통령은 석유 저장시설 관할권을 해군성으로부터 내무부로 넘겼다. 하딩 정권의 내무부 장관 앨버트 폴은 석유 저장시설 두 곳의 운영권을 민간업자들에게 넘겨버렸다. 공식적인 입찰 절차나 과정도 없었다. 나중에 재판에서 공개 절차를 밟지 않은 이유를 캐묻자 전직 내무장관 폴은 ‘군사 기밀 유지 필요성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진짜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점은 하나 있다. 폴이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뇌물 액수 40만9,000달러.


처음에는 내무장관 폴의 개인 비리로만 여겨졌던 스캔들은 만질수록 커졌다. 미국 굴지의 석유업자가 줄줄이 관련되고 집권당인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불하특혜 자금이 들어갔다는 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하딩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공식 사망 원인은 심장 마비)도 티포트돔 스캔들이 불거져 심신이 극도로 피곤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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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끈질긴 보도는 2년 뒤 상원 특별 조사위원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부통령에서 하딩의 대통령직을 승계해 재선에 성공한 캐빈 쿨리지 대통령 역시 하딩과 차별을 위해 의회와 사법부의 조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상원의 청문회 과정에서 죄상이 드러난 내무장관 폴은 구속 수감됐다. 미국 역사상 현직 각료 최초의 감옥행. 이것으로 끝났을까. 그렇다. 최소한 네 명의 기업인이 관련되고 그 가운데 두 명은 중죄에 해당됐지만 죄목만 주렁주렁 달렸을 뿐 누구도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았다. 1920년대 번영의 끝자락에서 세인의 관심이 멀어진 끝에 처벌은 솜방망이로 끝나고 해군의 유류저장시설만 기능을 잃었다.** 조사까지는 철저히 진행했지만 징벌은 꺼렸던 ‘번영과 질주의 20년대’ 직후에 무엇이 찾아왔는지는 익히 아는 대로다. 대공황.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나 탐욕스럽고 여성 관계도 복잡했던 하딩이 대통령까지 오른 이유가 있다.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출중한 외모와 ‘누가 나와도 이기는 선거에서 말 잘 듣는 순한 후보를 내자’는 공화당 원로들의 간택 덕분이다. 전임 윌슨 대통령이 주창했던 도덕정치와 원칙론을 지겹게 여기던 미국 유권자들은 표를 하딩에게 몰아줬다.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된 하딩은 옛 친구들에게 관직을 뿌리고 밀주와 카드놀이로 밤을 지새워 국민들에게 외면 당했다. 1923년 8월 그가 사망했을 때는 두 가지 설이 나돌았다. 티포트돔 스캔들로 심신이 쇠약해져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는 설과 대통령의 부인에 의한 독살설이 나왔었다.(하딩의 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30세 이혼녀 때 5년 연하의 하딩과 결혼해 남편을 정치인으로 키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평생 바람을 피우며 괴로움만 안겨줬던 남편이 백악관에서도 옛 친구들과 건달처럼 지내자 더 이상의 명예 실추는 싫다며 독살해버렸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졌었다.)

** 스캔들이 터진 뒤 티포트돔을 비롯한 해군 저유시설에서는 더 이상의 시설 확충도 없었고 새로 채굴하려는 시도 역시 없었다. 덕을 본 사람들은 애초의 원인 제공자들. 인근 유정에 파이프를 박아 기름을 빼내려던 석유업자들은 기회를 맞이하고 이들이 채굴한 원유의 일부는 일본에 수출돼 태평양전쟁을 야기한 일본군의 연료로 쓰였다는 추론도 있다.(F.L. 알렌 저, 원더플 아메리카)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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