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다시 경제, 그리고 기업이다]한국판 '로제타플랜' 꺼내든 야권...포퓰리즘 안된다

<1> 악순환 고리 끊자

최저임금 인상·경제민주화 등

글로벌 흐름 역행 '反시장적'

기업 장기 경쟁력마저 갉아먹어

당정 사정 드라이브 본격화 땐

경영활동까지 '올스톱' 될수도



벨기에 정부는 지난 2000년 이른바 ‘로제타플랜’을 시행해 종업원 50명 이상인 모든 사업장은 전체 근로자의 3%를 청년으로 의무고용하도록 했다. 이를 위반한 고용주에게는 미채용 청년 1인당 3,000프랑(약 9만원)의 벌금도 물렸다. 기업에 강제채용을 의무화한 이 법안은 시행 1년 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로제타’에서 시작됐다. 17세 소녀인 로제타가 공장에서 쫓겨나 고통받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벨기에 국민의 여론이 들끓었다.

벨기에 정부가 압력에 떠밀려 실시한 로제타플랜은 단기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그해 5만개의 일자리가 생겨 1999년 22.6%였던 청년실업률이 15.2%로 수직 낙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증(對症)요법의 한계는 뚜렷했다. 중장년층이 청년층에게 밀려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역차별 현상이 일어났고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내놓은 질 나쁜 일자리에 실망한 젊은이들이 대거 사표를 썼다. 기업들의 경영활동은 자연히 경직됐다. 각종 부작용으로 실업률이 다시 치솟자 벨기에 정부는 2004년 결국 이 법안을 폐기했다.

벨기에에서는 이미 실패로 끝난 정책이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한국판 ‘로제타플랜’을 앞세운 야권이 4·13 총선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일정 규모 이상의 민간기업에 총원 3% 이상 청년고용의무할당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했고 국민의당(5년간 5% 청년 고용 할당)과 정의당(대기업 매년 5% 청년 정규직 고용)도 비슷한 공약을 내놓았다.

김영완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근본적으로 시장경제의 원칙을 거스르는 반(反)시장적 대책”이라며 “연구개발(R&D)에 쓰여야 할 자원이 채용에 투입된다면 결국 기업의 장기 경쟁력마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4·13 총선 이후 재계에서는 정치권의 판도 변화가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마저 흔드는 악습의 고리를 이번에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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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경기 둔화 속에 외부 경쟁자들과 일전을 벌이기도 버거운 마당에 정치가 기업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투자와 고용의 주체는 결국 기업인데 기업의 숨통을 조이면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논리”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부각되는 반기업·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대책은 비단 로제타플랜뿐만이 아니다.

당장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 △경제민주화 △특정 지역 기업 투자 유치 △최저임금 인상 등 강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대책들이 여의도에서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특히 법인세 인상에 대한 우려가 크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4개국 중 27개국이 법인세를 인하하거나 유지하며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있는데 한국만이 글로벌 흐름에 역행하려 한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에 세금폭탄을 물리면 단기간에 세수는 늘지라도 고용과 투자가 위축되고 장기적으로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도 나타날 수 있다”며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경제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일감 몰아주기 규정 등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라고 강제하는 식으로 기업 지배구조 자체를 손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재계가 우려해온 제2의 경제민주화 바람이 총선 후 본격적으로 불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현대자동차그룹 등 지배구조에 취약성을 가진 국내 대기업들은 경제민주화 이슈가 불거질 경우 성장전략 마련은커녕 ‘회사 지키기’에 수십조원의 돈을 퍼부어야 할 상황에 몰리게 된다.

야권이 쏟아낸 공약과 별도로 재계 일각에서는 여당과 정부의 행보가 더 우려스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기 레임덕 우려에 빠진 청와대가 사정(司正) 드라이브를 걸어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공포에서다. 기업의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검찰이 올 초 출범한 반부패범죄특별수사단의 행보를 조마조마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조세회피처 문제 역시 금융당국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설 경우 잠재적인 화약고가 될 수 있다. 10대 그룹 소속의 한 대관 담당 임원은 “경제민주화나 증세는 야권이 단독으로 처리하기도 어렵고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두고 대응할 수 있지만 사정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며 “당장 그룹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가 수사선상에 오르면 해당 기업의 경영활동은 그 순간 ‘올스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정치권이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한계상황에 몰린 조선·해운업은 어떤 식으로든 재편이 시급한데 기업의 해고요건을 도리어 강화하거나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 생명을 연장하는 단기요법이 되풀이된다면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놓쳐 더 큰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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