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에 치우치다가 규제 완화를 통한 투자 분위기는 송두리째 날아갈까 걱정됩니다. 내년부터는 국회가 대선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에 올해 안에 규제 완화 법안들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2~3년은 그냥 허송세월할 수도 있습니다.”(재계 고위 관계자)
한동안 총선을 치르느라 기능을 멈췄던 국회가 21일부터 한 달간 임시 회기를 개시한다. 규제프리존 특별법이나 서비스발전기본법 등 규제 완화를 담은 미처리 법안들이 잔뜩 쌓여 있는 가운데 재계는 이번 임시 국회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저성장 기조 속에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기업의 자율과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가 반드시 풀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방위로 불고 있는 구조조정 한파가 걱정이다. 규제 완화 흐름이 뒷전으로 밀릴 수 있는 탓이다. 특히 내년부터는 대통령 선거 준비가 시작돼 국회가 사실상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만큼 이번 임시국회나 늦어도 올해 하반기까지 규제 완화 법안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정쟁에 휘말리거나 과거처럼 식물국회가 될 경우 규제 완화의 꿈은 물거품이 될 우려도 큰 만큼 재계는 조심스럽게 정치권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
21일 정·재계에 따르면 정부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규제프리존 특별법의 처리 여부가 지난 13일 총선 이후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다. 전국 14개 시도 27곳에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네거티브 방식의 규제를 적용해 입지와 세금·재정 등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제도인데 19대 국회에서 이를 대표 발의한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이 20대 국회에서는 의원 신분을 벗으면서 자칫 법안 추진이 주춤할 수 있어서다. 불과 2개월 남은 19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20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해야 하고 논의가 길어질 수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9일 전국 시·도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민간 부문의 내수 위축과 중국 등 세계 경제 부진 장기화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며 “민생 안정과 지속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규제프리존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가 재개된 만큼 통과에 기대를 걸어볼 법하지만 각 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어 통과까지 안심하기 이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제는 규제프리존 특별법 통과가 늦춰질수록 신산업 발전에 차질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 법은 충북의 바이오·의약, 대구 자율주행자동차, 전남 드론 등 한국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방안을 담고 있는데 법 통과가 지연되는 만큼 관련 기업들도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각종 규제 완화를 담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도 국회에서 잠자는 대표적인 법안으로 꼽힌다. 한국 국내총생산 중 서비스 산업 비중은 60%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10%포인트 이상 낮다. 생산성도 제조업 대비 43% 수준에 그친다. 반면 서비스 산업의 일자리 창출 효과는 제조업의 2배에 달한다. 계형산 한국창업보육협회장은 “전체 중소기업 수가 341만개로 전체 기업의 99.9%를 차지하고 그중에서도 서비스업은 293만개로 85.7%를 차지한다”며 “서비스업의 고용 창출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가 없이는 일자리 부족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점차 한국 제조업이 중국 등 경쟁국에 밀려 쇠퇴하는 가운데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이 서비스의 양적·질적 성장을 통해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킨 것처럼 우리도 낙후된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취지에서 서비스법이 18대 국회에 발의됐지만 폐기됐다. 서비스법은 19대 국회 출범 직후인 2012년 7월 재발의됐지만 ‘의료 민영화 법안’이라는 논란 속에 여전히 헛바퀴를 돌고 있다. 이 상태라면 19대 국회에서도 자동 폐기 가능성이 높다.
재계는 이번 임시국회를 포함해 올해 안에 어떻게든 규제 완화 관련 법안이 통과돼야 우리 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내년에는 대선 정국에 접어들며 국회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렵고 올해 역시 20대 국회 위원회 구성과 연말 국정감사, 예산안 심사 등 주요 일정을 제외하면 사실상 민생 법안을 처리할 시간이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특히 20대 국회의 경우 여소야대로 재편성되며 상대적으로 규제 완화를 주도하던 새누리당의 영향력이 축소돼 법안 처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여야 모두 경제 살리기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정쟁을 떠나 불합리한 규제를 푸는 데 뜻을 모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규제 완화가 가져다줄 경제적 이득은 수차례 확인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진입규제만 없애도 일자리 33만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최근 조사 결과 면허·허가 등 강한 진입규제가 폐지되거나 신고·등록 등 약한 진입규제로 변경되면 약 6만4,000개의 기업이 새로 생기고 직접 고용하는 일자리 33만2,000개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장품제조업은 2000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며 2007년까지 사업체 수는 두 배 이상 늘었고 종사자들도 30%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산업의 사업체 수 증가율(8.3%)과 종사자 수 증가율(17.2%)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1998년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바뀐 화물차 운송업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관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