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사람·신뢰 중시...한밤 폭풍우로 배 잃은 선주에 신용대출

<상>'조선은행에 장기영이 있다'

일본인도 인정한 업무 능력, 남다른 독서와 민족 자부심 간직



한국 현대사에 그보다 굵고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은행원에서 시작해 언론인을 거쳐 경제부총리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국회의원으로 60 평생을 살았다. 시와 문학을 사랑해 예술인을 후원하는 데도 아낌이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백상이다. 서울경제신문 창간 사주이기에 앞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선구자 백상 장기영 선생이 오는 5월 2일 탄신 100주년을 맞는다. 서울경제신문은 이에 백상의 뜻을 오늘날에 되살리기 위한 특집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여기 두 개의 문장이 있다. ‘뛰면서 생각하라’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물가의 동심원처럼 퍼진다.’ 전자는 불도저처럼 난관을 돌파했던 백상을 상징한다. 같은 제목의 책까지 나왔다. 후자는 백상의 미국 기행문 ‘태평양공로(太平洋空路·1955)’의 한 구절. 명문장의 예시로 교과서에도 올랐었다. 불도저와 명문장가. 백상의 면모를 이처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비도 없다. 백상은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1916년 5월2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동(현 서울시 한남동)에서 태어난 백상은 밖에서 뛰놀기를 즐기는 개구쟁이였으나 한남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는 1등을 도맡았다. 백상은 ‘성적이 나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1등을 했다’고 회고했지만 ‘뜻밖의 1등’은 평생 이어졌다.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선린상업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었다. 선린상업 우수졸업생에게는 경성고등상업(서울대 상대 전신) 무시험 입학 특전이 부여됐으나 백상은 1934년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탓이다. 진학을 단념한 그가 택한 직장은 당시에는 거대한 다국적기업이던 조선은행. 견습을 마치고 스무 살에 발령 받은 조선은행 청진지점에서 백상은 마음껏 재능을 발휘했다. 1943년에는 행내 현상논문 모집에서 ‘뜻밖의 1등’으로 만주 여행이라는 부상까지 누렸다.


백상의 당시 논문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라는 논문은 당대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다카다 야스마 박사의 이론과 케인스 이론을 접목했는데 ‘한국경제의 도약을 이끈 최고의 금융정책’으로 평가 받는 1965년 9월 금리현실화의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일류대 출신이 즐비한 조선은행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엄청난 독서에서 나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청진지점에서 백상이 독파한 4,000여권의 경제와 문학 서적은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내내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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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백상이 책보다 사랑했던 대상도 있다. 사람. 사람과 신뢰를 중시한 백상의 면모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태풍으로 배를 날린 선주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배를 잃고 한탄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다가온 백상이 대출을 권했단다. ‘담보가 없는데 어떻게 돈을 빌리냐’는 선주의 반문에 백상은 ‘폭풍우를 뚫고 배를 구하려 한밤중에 뛰어다니는 당신의 정신이 바로 담보’라며 지점장에게 대출안을 올렸다.

조선은행 초유의 신용대출은 기적적으로 이뤄져 선주는 재기하고 소련군 진주 후에는 남하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 그룹을 이뤄냈다. 일개 주임이 어떻게 신용대출을 할 수 있었을까. 인정받았던 덕분이다.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한은총재’로도 유명한 민병도 전 한은총재(퇴임 후에는 경춘관광 회장)가 남긴 말이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행한 신입행원 민병도는 일본인 상사들로부터 ‘조선은행에 장기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고 감동한 나머지 백상을 찾아 평생 우정을 나눴다.

일본인들에게 높게 평가 받으면서도 백상은 민족적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백상은 행세한다는 사람치고 드물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장기영’ 이름 석자를 지켜내며 해방을 맞이한 백상은 위기를 맞았다. 시장경제를 부인하는 소련군이 진주하자 애지중지하던 장서를 놔두고 청진을 떠났다. 대부계 장부 일체를 들고 남하한 백상은 본점에 찾아가 ‘조선은행 청진지점 서울출장소’라는 간판을 걸고 대출 영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경제상황은 극도로 나빴다. 패배를 확인한 조선총독부가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고의적으로 화폐를 남발한 탓이 컸다. 백상은 이에 서울신문 1946년 2월8일과 9일 연이틀 실린 ‘화폐가치 안정대책의 원칙’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일본이 통화를 남발한 부분을 대일 청구권에 포함시키되 일단 미국에 대신 받아 새로운 조선은행권 발행과 경제건설에 활용하면 초물가고를 잡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백상의 이 같은 아이디어는 경제부총리 재임 시 외자도입 활성화정책으로 빛을 발했다.

한국은행 조사부를 키워내며 승승장구하던 백상은 한국은행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해 물러나며 은행원의 뜻을 꺾었지만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론계의 첫 출발인 조선일보에서도 백상은 기적을 일궈냈다. 사장으로 재임하던 2년 동안 백상은 부수 13배 신장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조국에 맞는 새로운 언론 창달에 나선 것이다.(계속)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1934년 조선은행 청진지점- 야망에 부푼 장기영 행원(왼쪽 두 번째)과 지점 멤버.1934년 조선은행 청진지점- 야망에 부푼 장기영 행원(왼쪽 두 번째)과 지점 멤버.


이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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