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한은의 기틀 다진 백상 장기영

[백상 장기영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기고]

한국은행법 제정, 금융 현대화 산파역

후배로서 불꽃같은 열정 이어받고파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백상(百想) 장기영 선생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색조 같은 인물이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종로구 유권자들에게 “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피는 언론인이며, 몸은 체육인이니, 이제 정치인으로서 나의 얼굴을 완성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이순(耳順)을 겨우 넘기고 일찍 작고한 분이 그토록 다방면에 굵은 족적을 남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융인으로서 백상을 추억하는 것은 그분의 진면목을 왜곡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행과 한국은행에서 보낸 17년은 그분의 일생에서 중요한 기간이었고 그 시기에 이룬 업적 또한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괄목할 만한 것이라서 오늘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백상은 1934년 선린상고 졸업과 함께 조선은행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당시 청어잡이로 상당히 번성했던 청진지점에서 20대를 보냈다. 워낙 친화력이 좋고 활동적이었던 백상은 청진에서 은행원이라기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웠다. 같은 은행원이었던 조선식산은행의 박승복(샘표식품 회장)은 물론 아무 연고가 없던 청진에서 설경동(대한전선 창업주) 등 현지 사업가들과 의형제처럼 지내며 그들의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결해줬다.

그렇다고 차분하게 연구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 말 조선총독부의 명령이 무뎌지고 화폐제도가 흔들리자 ‘만주 국경지대의 국폐문제와 만주국내에 있어서 조선은행권 퇴장사정(1944년 9월)’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도쿄 본부의 이사에게서 큰 칭찬을 듣기도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조사업무였다. 해방 직후 조사부 차장 시절에는 ‘조선경제연보(1948년 7월)’를 발간했다. 금융기관과 각종 협회 직원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그 자료는 오늘날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국민소득통계·국제수지통계·금융통계·기업경영분석·산업연관표의 원조 격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백상이 스스로 생각해보고 밀어붙인 일이었다.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는 일제강점기에 연구 인력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백상을 발굴해 조사부를 맡긴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문장력도 뛰어났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남북 신탁통치 방안이 결정되자 장기영은 금융기관 직원 대표로서 반탁결의문을 작성했다. 그 때문에 미 군정청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함께 해고 위협을 받기도 했다. 금융계가 알아주는 문장력은 훗날 언론계에서 더 큰 빛을 보았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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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백상의 업적은 역시 한국은행법과 은행법 제정에 기여한 점이다. 금융제도의 현대화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김도연 재무장관,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가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격상되는 것을 시샘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상은 양 법안의 초안을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재무부를 설득하고 국회에 호소해 두 법이 통과되는 데 수훈갑이었다. 그때 그가 열심히 뛰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일제 때의 금융 시스템으로 6·25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장기영의 활약과 공로가 너무나 두드러진 나머지 한국은행 안팎으로 많은 적이 생겼다. 한국은행 설립 1년 후 백상은 외압에 의해 한국은행을 떠났고 그는 너무 속이 상해서 10년간 한국은행 옆을 지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백상이 한때 지나다니지 않으려 했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는 금융계에 남긴 그의 업적이 방문객들에게 소개돼 있다.

필자가 백상을 잊지 못하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필자는 어릴 때 서울 삼청동에 살면서 한국일보 사옥을 자주 방문했다. 당시 건물 밖에는 행인들을 위한 신문 게시판이 있었고 1층에는 조흥은행 수송동 지점이 있었다.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신문 게시판으로 몰려가 길창덕 화백이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하던 아동만화 ‘재동이’를 훑어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용돈을 저축하는 것이 일과였다(필자가 다닌 재동초등학교에는 ‘재동이’의 팬들이 아주 많았다). 당시 아주 귀했던 에어컨이 조흥은행 안에 설치돼 있어서 기분 좋게 더위를 식히며 책과 잡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란 필자는 백상의 기상과 열정으로 세워진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기능이 사회적 이슈가 됐을 때 필자가 마침 한국은행법을 담당하고 있어서 백상이 1950년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기도 했다. 이제 백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분에 대한 필자의 부채의식과 인연을 떠올린다. 그리고 백상의 그 불꽃 같았던 열정을 이어받을 것을 감히 다짐한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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