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김준경 "환율·금리·물가·외자문제 한번에 풀어…백상은 경제 해결사"

경제부문 김준경 KDI 원장

박정희 정권 시절 부총리직 역임

기득권 벽 뚫고 구조개혁 이끌어

현장중심 행정 물가안정서 빛발해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2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백상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권욱기자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2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백상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권욱기자


“백상은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정책을 추진한 분입니다. 금리·환율·물가·외자 등 네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는데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칭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이번 세미나 경제 부문에서 백상 장기영 선생의 업적을 조명한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의 평가다. 그는 “1960년대 제3세계에서는 종속이론의 유행 때문에 수입대체 정책 일색이었는데 유일하게 시장 친화적 개방정책을 펼친 게 우리나라였다”며 “백상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기득권의 반대로 이 같은 구조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의 추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상을 직접 불러 부총리직을 제안했다. 당시 경제 상황은 암울했다.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골자는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입대체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1962년 역사상 가장 큰 실패를 맛본 정책으로 평가되는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한다. 국민이 은행에 맡긴 예금을 동결해 그 재원을 산업개발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당장 미국이 국가 자본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식량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나섰다. 부산항과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미국이 원조 농산물 하역을 중단하자 결국 한 달여 만에 조치가 철회된다. 김 원장은 “은행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은행 예금이 사채시장으로 많이 빠져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백상은 이 같은 경제 현실을 누구보다 직시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에게 시장 자유화 정책이 실현돼야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에서 차관을 들여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만 그 같은 구조개혁이 “정말 어렵다”며 강력한 지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고 박 전 대통령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가 부총리에 올라서자마자 단행한 첫 번째 구조개혁은 환율제도의 개혁이었다. 김 원장은 “당시에는 업종과 용도에 따라 환율을 달리 적용하는 복수환율제도로 운영됐는데 때문에 수입업자와 공직자 간에 유착이 있었다. 수입업자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단일변동환율제도로 바꾼 건 백상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정책 발표 이후 몇 시간 만에 당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 정부의 환율제도 개혁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개발차관계획의 확대를 약속했다. 김 원장은 이를 두고 “우리 역사의 터닝포인트였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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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카드는 금리 현실화였다. 백상은 사채시장에 머물고 있는 돈이 은행 예금으로 들어오고 이 돈이 산업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이른바 ‘내자조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 원장은 “1년 만기 정기예금 최고 이율이 하룻밤 사이에 15%에서 30%로 인상됐다. 그 이후 1년여 만에 저축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다”며 이를 “금융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조치”로 평가했다. 수입 자유화 조치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김 원장은 ‘엄마가 쓰는 외래품에 아빠 공장 무너진다’는 표어를 소개하며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자동 수입승인 품목이 ‘제로’였는데 수입 자유화 조치 이후 1년 반 만에 63%로 올랐다”며 “제3세계에서 대외개방 정책을 편 것은 우리나라가 최초였다”고 말했다.

백상의 소신이었던 현장 중심의 행정은 물가안정에서 빛을 발했다.

이 같은 백상의 시장 중심 구조개혁을 통해 우리나라는 대규모 외자조달에 성공하면서 후일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김 원장은 “1966년 미국 대외원조국(USOM)에서 한국 경제의 성공을 미국 정부에 보고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규모 차관 지원을 약속했다”며 “외자 도입이 없었으면 우리나라 공업화도 못했을 것이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아주 중요한 문제였는데 백상이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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