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한 이민자의 아메리칸 드림 성공기

소시 세티안은 ‘철의 장막’ 시대를 겪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언어적 감각과 ‘깡’을 앞세워 SOS 인터내셔널의 성공을 이끌었다.



소시 세티안이 맨하튼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소시 세티안이 맨하튼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소시 세티안 Sosi Setian은 아르메니아 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법정 통역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미국 마약단속국(DEA) 직원들의 눈에 들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돈 세탁 사건 관련 통역을 부탁했다. 올해 72세인 세티안은 그후 자신의 언어적 능력과 직업 윤리를 활용해 SOS 인터내셔널 SOS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오늘날 이 회사는 연매출 2억 달러를 통 · 번역, 정보 분석, 군수 등 다양한 분야의 정부 계약을 통해 벌어들이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아르메니아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나 불가리아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섬유 무역업을 하셨다. 당시 성공한 사업가는 ’기득권 부르주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고, 그 가족들은 차별을 당해야 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 정권이 자신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착취해 간다고 종종 말씀하곤 하셨다. 때문에 나는 학급 친구들과 여름 캠프를 갈 수 없었고, 우등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감시를 당했다. 아버지는 담요로 창문을 가리고,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라디오 방송이 밖으로 새나는 것을 막곤 하셨다. 아버지는 결국 1959년 이민을 결심했다.

우리 가족은 합법적으로 떠났지만, 불가리아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재산도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우리는 우선 베이루트로 갔다. 당시 베이루트는 서류 없이도 공산주의 국가 출신 아르메니아 이민자들을 받아주는 유일한 국가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2년 동안 살면서 미국으로 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1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미국에 왔기 때문에, 그 날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당시 나는 18세였고, 베이루트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과 결혼을 한 상태였다. 남편이 내게 미국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해서 우린 캘리포니아 행 버스를 탔고, 그곳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딸 판도라 Pandora를 출산했다. 그 후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가 나의 진학을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르메니아어, 불가리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영어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TV를 많이 보면서 공부해 몇 개월 후에는 영어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복수 전공으로 UCLA를 졸업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파리와 카이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포드 재단 펠로우(Ford Foundation Fellow)로 활동했다.

그 뒤 몇 년간 우리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고, 아들 줄리언 Julian을 낳았다. 남편과 나는 베이루트 미국 대학(American University of Beirut)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5년 내전이 일어났다. 나는 더 이상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 수 없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별했고, 결국 나중에 이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1976년 두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와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아르메니아학과 교수로, 그리고 문리학부 학장 조교로 일했다. 문화 인류학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7,000달러 급여를 받고 뉴욕시 법정 동시 통역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 돈으로 아들 줄리안, 편찮은 엄마, 그리고 나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 마약단속국 직원들로부터 아르메니아어로 된 테이프 하나를 번역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번역을 해주었고 번역비는 사양했다. 어차피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해준 것이었다. 그때 그 직원들은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후 그들은 내게 마약 단속국의 통역사로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왔다.


나는 정규직을 수락하고 하루에 12~15시간 돈세탁 사건을 맡아 일했다. 중동에서 밀수되는 마약과 돈세탁을 하는 아르메니아인에 관한 것들이었다. 나는 도청 테이프 내용을 적으며 전화 내용을 분석했다. 나는 그 일이 너무 좋았다. 악당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데 한몫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주급으로 1,500달러를 받았다. 당시 8개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했지만 매우 중요한 인간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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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마무리 되자 나는 출발점으로 돌아왔고,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 했다. 대학교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건 가족을 부양하기엔 부족한 돈벌이였다. 그때 마약단속국 직원들이 내게 창업에 대한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1989년 SOS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 이름을 등록한 후, 명함을 파고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업무의 85%를 마약단속국 뉴욕지부로부터 의뢰 받았다. 일부는 FBI와 이민 · 세관심사국(Customs and Immigration)이 요청했다. 처음 7년간 나는 하루도 쉬지 않았고, 나 스스로에겐 단 한 푼도 급여를 주지 않았다. 1994년 회사를 법인화 한 후에야 급여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들 줄리안이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합류했다. 우리는 회사의 확장과 다각화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D.C. 지역을 벗어나 뉴욕과 버지니아에 지사를 설립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재택근무를 고수했다.

9 · 11 테러가 나기 전까지, SOS 인터내셔널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하지만 테러 발생 후, 미국 정부가 자격을 갖춘 외국어 전문가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2002년이 되자 베르소프 테크놀로지 그룹 Bersoff Technology Group이 우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미군에 통역사를 제공하는 소규모 계약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1,000만 달러 계약이 훨씬 큰 계약 건으로 이어졌다.

미군이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수백 명의 통역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 인력 제공 서비스가 3년 동안 우리의 핵심 사업이 되었다. 당시 우리의 사업 영역은 IT, 자료 분석, 공학, 건설, 그리고 군참으로 나눠져 있었다. 2년간 회사 매출은 3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사업 자금이 증가하면서 성장이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의 연매출은 2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했다. 우리는 중동에서 거의 3,000명 가량의 미군 인력을 책임지고 있으며, 전국 법원에 통역사들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못하는 도전을 선택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민자로서, 미국의 안보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 진심을 주면 진심이 돌아온다
소시 세티안이 어떻게 능력 있는 직원들을 보유하게 됐는지 설명한다.
사업 초기, 각각 회사를 운영하는 3명의 여성 경쟁자들이 있었다. 미국 마약단속국은 4개 회사 모두에게 충분한 일감을 제공했다. 추가 일감이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에, 모든 경쟁사가 계약직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직원들이 고용 안정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규직 직원으로 채용해 모든 혜택을 제공했다. 경쟁사들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지급했고, 한 달에 한번씩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도 함께 했다.

1995년 정부가 2번 폐쇄됐을 때, 우리는 계속 일해도 돈을 못 받을 수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직원들에게 전가할 순 없었다. 그래서 4만 달러 대출을 받아 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회사도 살리고, 모든 직원들이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도 주고 싶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Interview by Dinah Eng

안재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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