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종목·투자전략

외환위기에 쓰러지고…M&A로 간판 바뀌고…영욕 교차한 '한국의 월스트리트'

[토요watch]여의도 34번지 잔혹사

1979년 증권거래소 여의도 이전

대우·대신·동서 등 속속 옮겨와

90년대 여의도공원쪽까지 확장

IMF 찬바람에 고려증권 첫 희생

동남증권 등도 잇따라 간판 내려

대우 인수 미래에셋 중구로 옮기고

신영 등 '강소증권사'가 자리 지켜



서울 여의도 34번지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증권사는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 지난 1970년 중구 명동2가 한송빌딩에서 시작한 미래에셋대우는 1982년 9월 명동 시대를 접었다. 1979년 7월 증권거래소가 명동에서 여의도로 옮겨가자 1위 증권사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이후 대신증권과 신영증권·한양증권·동서증권이 차례로 이전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LG투자증권(옛 럭키증권) 등 8개사가 명동에서 여의도 34번지로 본사를 옮겼다. LG투자증권의 후신인 NH투자증권 관계자는 “과거 한국의 월스트리트는 34번지였고 1996년 이후 한화투자증권·현대투자신탁·쌍용투자증권이 여의도공원 쪽으로 이전하면서 여의도 증권가가 확장됐다”고 말했다.

1988년 코스피지수가 1,000을 넘어선 후 1996년 파생상품 시장에 이어 홈트레이딩시스템(HTS) 도입으로 기세등등하던 증권사들은 외환위기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기업의 부실에 증권사는 가장 먼저 구조조정 대상으로 떠올랐다. ‘응답하라 1994’ 드라마 속 성나정에게 좌절을 안겨줬던 고려증권은 구조조정의 철퇴를 가장 먼저 맞았다. 1997년 12월5일 부도 처리된 고려증권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의 서막을 알렸다. 고려증권 부도처리 후 1주일 만에 동서증권이 추가 담보제공 불가능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동서증권이 자리했던 34-1번지는 현재 TNS Korea와 심팩홀딩스·IBK기업은행 등이 쓰고 있다. 동서에서 교보로 옮겨 사장까지 올랐던 변상무 전 교보증권 사장은 “당시 증권사 부도는 증권사 자체의 부실보다 모기업의 무리한 투자와 확장경영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2012년 뒤늦게 34번지에 합류한 IBK투자증권의 본사는 과거 동남증권이 사용했다. 동남증권은 보람은행 출범 이후 보람증권으로 상호를 바꾸기도 했지만 역시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하나은행과 통합되는 과정에서 간판을 내렸다. 한국예탁결제원 자리인 34-6번지는 럭키증권 본사로 사용됐다. 1969년 한보증권을 모태로 출범한 럭키증권은 럭키·LG증권·LG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을 거쳐 2014년 NH농협증권과의 합병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LG투자증권과 합병됐던 우리증권은 한국증권금융 옆건물을 사용했지만 간판을 내린 지 오래다.


34-3번지에 위치한 미래에셋대우는 미래에셋과의 통합 이후 중구 수하동 미래에셋 센터원으로 본사를 옮길 예정이다. 이달 초 대우증권 간판에서 ‘KDB’는 제거됐다. 미래에셋증권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출범한 1999년 이후 줄곧 여의도 생활을 해오다 2011년 현재의 본사로 이전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지관과 함께 명당을 찾아 조선시대 동전을 만들던 주전소(鑄錢所) 자리에 터를 잡았다. 여의도는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돈이 새는 형태지만 수하동 미래에셋 센터원은 청계천을 따라 돈이 흘러 주전소에 모이는 명당이라는 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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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합병(M&A) 과정에서 매물로 나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경우도 많았지만 회사를 성장시켜가면서 간판을 바꿔 다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한신증권을 인수한 동원증권은 지금의 농협재단 건물을 본사로 두고 있었다. 2005년 한국투자증권과 합병하면서 34번지를 나와 여의도광장 쪽으로 이전했고 동원증권을 버리고 한국투자증권으로 피인수기업의 상호를 땄다. 한국투자증권 관계자는 “피인수기업이지만 ‘한국에 투자한다’는 의미가 있고 해외진출을 고려할 때 동원보다는 한국투자라는 상호가 유리하다는 경영진의 판단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 대우증권 인수에 성공했을 경우 대우라는 1등 브랜드를 높게 평가해 내부적으로 한국투자 대신 대우증권을 상호로 사용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대신증권은 올해 말 서울 명동 신사옥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의도 대신증권 본사 사옥의 상징인 황소상도 같이 간다. 30년 만에 고향인 명동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30여년간 여의도에서 많이 성장했던 대신증권이 고향과 같은 명동으로 돌아가게 돼 의미가 있다”며 “제2의 명동 시대가 열리는 만큼 대신증권도 제2의 도약을 위해 회사의 역량을 집중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대신증권과 빌딩을 ‘쌍둥이’처럼 나눠쓰던 신영증권은 이 건물을 2013년 인수했다. 고(故) 양재봉 대신증권 회장과 원국회 신영증권 회장이 친분이 두터워 같이 건물을 세웠던 대신증권 빌딩에 신영증권이 입주하게 돼 34번지 터줏대감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34번지를 오랫동안 지켜온 증권사는 신영을 포함해 부국증권과 메리츠종금·한양증권 등이 있다.

증권사 관계자는 “업계 1, 2위를 차지했던 증권사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작고 강한 증권사들이 오랫동안 영업을 한자리에서 해내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며 “유행이나 시류에 따른 투자보다 묵묵히 특화된 영업에 집중해온 결과”라고 평가했다.

송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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