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경제·금융일반

[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피란 온 학자·시인 굶어가고 있다" 戰時 신용대출 밀어붙인 장기영

"이 사람들 잃으면 국가재건 비용·시간 몇 배 더 들어"

핵심 인재들 300여명에 중견 행원 두달치 봉급 지원

정부 금융제재로 대출 막히자 어음 융통하려 동분서주

유신체제 저항하던 서울경제 기자들 마지막까지 지켜

지난 1949년 5월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대전 지점을 방문한 장기영(앞줄 왼쪽 네번째) 조사부장.  /사진제공=한국은행지난 1949년 5월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대전 지점을 방문한 장기영(앞줄 왼쪽 네번째) 조사부장. /사진제공=한국은행


<대한민국을 살린 중앙은행의 전시 신용대출>

금융인으로서 백상 장기영의 보이지 않는 공로가 있다. 백상은 전회(前回)에서 봤듯이 한국은행의 탄생은 물론 1970년대 초반까지 국내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 손꼽히던 ‘한은 조사부’의 기틀을 닦는 등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전시 신용대출’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이 보다 더뎠을지도 모른다.


백상과 함께 조선은행·한국은행에서 일했던 원로 몇 분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6·25전쟁으로 부산까지 밀렸을 때 장기영 조사부장이 느닷없이 ‘개인에 대한 신용대출이 절실하다’는 건의안을 올렸다. 조사부의 업무영역도 아니거니와 적법성 논란도 일었다. 일제강점기인 조선은행 시절에는 개인 및 기업 대출을 했지만 전쟁 직전 한국은행법이 통과된 후 중앙은행으로 자리 잡은 마당에 개인대출이 가능하지 않다는 반대가 일었다. 결국 백상은 개인 신용대출안을 통과시키고 집행했다.

백상은 ‘피란 온 학자와 문인·예술가 저명인사들이 전쟁 통에 굶어가고 있다. 이들이 굶어 죽거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질 경우 이 전쟁에서 적을 물리쳐도 나라를 재건하는 비용과 시간이 몇 배나 들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고 한다.

당시 한은이 급히 추린 지원 대상은 300여명. 한 사람당 5만원씩 개인대출을 해줬다. 백상의 선린상업학교 2년 후배로 당시 한국은행 서무과장을 지내고 훗날 은행감독원장과 국민·조흥은행장을 역임한 문상철(101세)옹은 몇 년 전 기자와 만나 “당시 돈 5만원은 요즘 기준으로 한은 중견 행원의 두 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며 “이런 대출로 핵심 인재들이 기아를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출금을 받아갔던 사회 저명인사, 지도층인사들 가운데 대출금을 갚은 인사는 불과 몇 명 안 됐다고 한다.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가인 김병로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후일담이 씁쓸하지만 인적 자산, 특히 뜻은 있는데 어려운 여건의 인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백상 장기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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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은 화요일마다 서울경제·한국일보사 편집국 기자 전원을 모아놓고 지면에 대해 난상 토론을 하는 화요회를 열곤 했다. 화요회가 시작되면 기사 하나하나에 대해 사장과 기자들이 질타하고 반박하며 웃느라 편집국 전체가 시끄러웠다.  /사진제공=백상재단백상은 화요일마다 서울경제·한국일보사 편집국 기자 전원을 모아놓고 지면에 대해 난상 토론을 하는 화요회를 열곤 했다. 화요회가 시작되면 기사 하나하나에 대해 사장과 기자들이 질타하고 반박하며 웃느라 편집국 전체가 시끄러웠다. /사진제공=백상재단


<금융제재 받으면서도 유신체제 저항하는 기자 보호>

백상 장기영은 기자들에게 곧잘 불호령을 내리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아꼈다. 경제부총리 재임시에도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즐겼다. 상대적으로 개성과 자존심이 강한 기자들이 백상을 스스럼없이 ‘왕초’라고 불렀다는 점은 존경 받는 리더십으로서 백상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백상은 어떤 위기가 와도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유신 초기 정부의 언론 통제가 강해지면서 기자들이 권력의 종용으로 직업을 잃는 사태에서도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에서는 해직 기자가 없었던 이유도 백상이 기자들을 보호했던 덕분이다. 실은 가장 먼저 정부의 통제에 반발한 곳이 서울경제와 한국일보의 기자들이었다. 1973년 11월7일 편집국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철야 농성을 벌인 데 이어 보름 후에는 150여명이 모여 ‘언론자유 확립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다른 언론사에도 이 같은 움직임이 확산되자 정부는 언론사 사주들을 윽박질러 기자들을 내쫓았다.

가장 먼저 기자들이 움직였던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에도 정권 차원의 압력이 가해졌다. 광고가 쉽지 않았고 금융권 대출도 막혔다. 백상은 정계의 실력자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사람들을 큰 가슴으로 포용하는 게 더 낫다. 자르면 다 길거리로 나서 더 시끄러워질 수 있다. 정부에 저항하려고 기자들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니 금융제재를 풀어달라’라는 요지였다. 간곡한 부탁과 설득에도 정권은 듣지 않았다. 은행은 물론 보험과 단자까지 막혀버린 금융제재는 1년 반 동안 이어졌다. 백상은 물론 간부급 기자들까지 이리저리 뛰며 어음을 구해 자금을 융통, 회사를 꾸려나가면서도 기자들을 지켰다. 당시 금융제재가 없었다면 1977년 급서한 백상의 수명이 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지근거리에서 백상을 지켜봤던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백교문학회 회장)은 “백상은 편집국이라는 곳을 각양각색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일하는 곳으로 여겼다”며 “사주라고 기자를 마음대로 내쫒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유신 정권은 기자 해고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백상이 미웠으나 국제무대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직접 해치지는 못하고 금융제재라는 수단을 동원했는데 여기에서도 ‘왕초’답게 끝까지 버텼다는 것이다. 60세 짧은 생을 살다 간 백상의 50대 중후반 최대 관심사는 정권의 압력에서 기자를 보호하는 데 있었다는 얘기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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