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장영자 사건 - '정의사회 구현, 좋아하네'



1982년 5월 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 수사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혐의는 외국환관리법 위반. 명동 암달러시장과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80만 달러를 모았다는 혐의였다. 검찰의 당시 발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는데도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주변부 인물이 사건의 중심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장영자(당시 38세)가 누구인가. 청와대 안주인 이순자씨 삼촌 이규광의 처제였다. 남편 이철희(당시 59세)는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던 인물. 대통령 친인척의 관련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폭발력이 커졌다. 권력을 등에 업은 듯한 금융 사기였던데다 피해 규모가 대형이었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검찰 수사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놀랐다. 사채시장의 큰손이던 장영자(당시 38세)는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와 접촉해 무이자로 현금을 빌려주고 2~9배에 이르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장 씨는 남편의 경력을 들먹이며 “우리 돈은 특수자금이니 비밀을 지키라”는 말을 덧붙였다. 공영토건에는 빌려준 현금의 9배나 되는 1,279억원의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약속어음을 할인해 다른 회사에 빌려주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받은 어음 총액이 7,111억원. 여기서 6,404억원 어치를 할인받아 썼다.

장영자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목을 날렸다. 은행장 두 명과 기업체 간부, 전직 기관원, 대통령의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구속된 인원만 31명.* 대형 상장업체로 장 씨와 거래했던 일신제강과 공영토건은 부도가 났다. 사건은 초기부터 권력 배후설이 끊이지 않았다. 시중은행이 담보도 안 잡고 수백억원을 개인에게 대출해줬다는 사실부터 미심쩍었다.

과연 최고 권력이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목할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자들이 대거 권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장 여인이 수상하다’는 보고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올렸던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영부인도 자중해야 한다’고 말한 뒤 부장직에서 물러났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도 옷을 벗었다. 연루 혐의를 받았던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도 사표를 냈다. 5공의 창업공신으로 ‘실세 중의 실세’라던 허화평 정무수석과 허삼수 사정수석도 이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사가 진행되며 권력형 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찰관 8명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1981년 5월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청담동 자택에 3인조 강도가 들어 ‘한국에 하나 밖에 없다는 3캐럿 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와 현금을 털었다. 경찰은 쉬쉬하며 최정예 형사들로 전담팀을 꾸려 6개월 만에 범인을 잡아냈다. 장영자는 ‘유공경찰관’ 8명을 집에 불러 일렬로 세운 뒤 한 명씩 이름을 호명해가며 50만원이 든 사례금 봉투를 나눠줬다. 결국 이들은 전말이 밝혀지며 경찰에서 쫓겨났다. 억울했겠지만 50만원이면 큰돈이었다. 대학등록금이 약 30만원이었으니까. **

이렇게 저렇게 터지는 사건의 진상과 후폭풍은 5공 정권의 도덕성에 내상을 안겼다. 당연히 정권의 권위도 뿌리부터 흔들렸다. 마침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경찰관 하나가 경남 의령에서 소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62명이 죽고 33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한 게 4월 말. 흉흉해진 민심과 사채시장 위축 등으로 더욱 어려운 경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권은 각종 경제 대책을 쏟아냈다.

제 1탄이 나온 게 5월 7일. 단자사(투자금융회사·1996년 종금사로 전환)에 긴급자금 500억원을 지원하고 중소기업 지원에 2,000억원을 책정했다. 급락하는 주가의 안정을 위해 기관투자가들에게 주식 매입 확대를 다그쳤다. 이어 6월28일에는 더욱 획기적인 조치가 나왔다. ‘금리 4.5%P 인하, 법인세율 33~38%에서 20%로 대폭 감축’을 골자로 하는 6·28 경기활성화 조치는 해외출장 중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그럴 리 없으니 다시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정부의 과감한 결단에는 자신감과 위기감이 복합 작용했다. 3공 시절부터 내려온 고질적인 물가급등세는 잡았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수출부진과 경제난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가운데 정국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조바심에서 초대형 대책을 잇따라 선보였다. 6·28조치 발표 불과 닷새 뒤에는 보다 메가톤급 대책이 나왔다. ‘금융실명제의 실시와 사금융 양성화’ 등을 담은 7·3조치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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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의욕만 앞섰다는 점. 주무부처 장관조차 몰랐다. 뿐만 아니라 6·28조치가 나오기 불과 닷새 전에는 재무부가 법인세를 올린다는 세제 개혁안을 발표했을 만큼 정부 부처끼리 손발이 맞지 않았다. 민심 이반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뭔가 대책이 필요했던 청와대의 독주와 물먹은 관료들의 불만, 금융실명제에 대한 여당과 기업인들의 반발로 연이어 나온 초대형 경제대책은 곧 빛을 잃었다.

금융실명제의 생명이 꺼지고 법인세 인하도 없던 일이 돼버렸다. 장영자 사건과 잇단 경제 정책 실책의 후유증은 국민경제가 그대로 떠안았다. 저금리와 실명제 추진에 거액의 자금이 제도권에서 빠져나가 부동산 투기를 확산시켰다. 1982년에는 기업공개가 단 한 건도 없을 정도로 증시도 힘을 못 썼다. 얼마 뒤에 굴러들어온 3저 호황이 없었다면 전두환 정권의 경제는 대형 조치의 후유증으로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5공은 운이 좋았다.

최종심에서 법정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은 장영자·이철희 부부는 10년 가까운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출소한 뒤에 이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다고 토로했다. 검찰이 발표하기 며칠 전인 1982년 4월29일 자신들을 구속하기 전까지는 1원 한 장 부도나지 않았는데 둘을 한꺼번에 구속해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과연 검찰과 국세청이 손을 안 댔다면 이들의 수건돌리기 게임은 지속될 수 있었을까.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주장대로 그들이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면 누가 기획하고 연출했을까. 설이 많다. 5공 실세들이 주도하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에게 미움을 샀다는 설과 최고 권력층의 비자금 루트였다는 해석이 동시에 존재한다. 분명한 점은 두 가지다. 국민들의 숫자 감각을 무디게 만들 만큼 대형 부패사건이 꼬리를 물었다는 점이 첫 번째. 두 번째는 대통령 자신들이 부패의 장본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검찰이 밝혀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 규모가 최대 1조 4,000억원…. ‘단군 이래 최대’였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당시 금융계는 두 가지 프레임으로 장영자 사건을 대했다고 한다. 반성과 반발. 금융 비리를 반성하면서도 정권에 대해서는 반발감이 커졌다. 1980년 7월 중순 ‘금융계 숙정(肅正)’이라는 이름 아래 은행과 보험, 증권사에서 임직원 431명이 쫓겨나는 사태를 겪은 뒤끝. 장영자 사건을 보며 금융계 종사자들이 느낀 감회는 남달랐다. 금융계 숙정은 국가보위특별위원회가 민심을 강제로 수습하기 위해 동원한 이른바 ‘사회 정화’ 라는 이름 아래 ‘삼청교육대’와 ‘비리 공직자 추방’과 같은 맥락에서 취급됐다. 숙정의 압력을 피할 수 있던 곳은 해외교포 자본으로 설립된 한 회사의 대주주가 신군부와 끈이 닿아 업계 전체가 특혜를 입은 단자업계 뿐이었다.

정의사회를 만들겠다며 금융인들을 숙정한 뒤 물이 맑아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신군부와 친했던 어떤 인사는 금융권의 황제로 행세했다. 하루아침에 대리에서 부장으로 승진해 결국 은행장 자리까지 오른 사람도 있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국보위의 숙정은 금융 혼란으로 이어졌다.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과 명성 사건 같은 권력형 금융 부조리가 터진 게 바로 5공 시절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 명동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넥타이 부대가 거리를 매웠던 데에도 5공과 권력형 금융비리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깔려 있다.

** 장영자 사건은 온 국민에게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웃지 못할 일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다시 등장했다는 점. 1982년 11월, 경찰은 대도(大盜) 조세형을 체포했는데 압수품 가운데 물방울 모양과 보트 모양으로 가공한 다이아몬드 2개가 나왔다. 크기도 컸다. 각각 5.75캐럿과 5.6캐럿. 불과 5개월 전 장영자 사건이 교육 시켜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기억하고 있던 국민들은 한국에 단 하나라던 장영자의 물방울 다이아몬드보다 더 큰 것이 있었다는 점에 놀라고 도둑 당하고도 쉬쉬했다는 점에 더욱 놀랐다. 국민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하는 정권을 속으로 비웃었다. ‘정의사회 구현, 좋아하네’

물방울 다이아몬드 얘기 3탄은 장영자 사건 29년 만에 등장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진영에서 BBK 의혹을 막아내는데 기여했고 감사위원을 지낸 검사 출신의 인사가 부산저축은행 로비와 관련해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받았다는 논란이 2011년을 달궜었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 물방울 다이아몬드는 ‘신의 눈물’이 아니라 ‘신의 저주’인지도 모른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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